책으로 피어나다
나는 어릴 적 아빠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제공한 사택(社宅)에서 살았다. 사택이라고 해봐야 총 5 가구가 모여 사는 곳이었다. 아빠는 집 뒤 공터가 아깝다고 쉬는 날마다 가꿨고 나중에는 가지나 고추, 옥수수, 딸기, 고구마, 감자를 심은 밭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두 살 터울 나는 오빠와 나 이렇게 네 식구였다. 흔히 교과서에 나오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엄하고 엄마는 자애로운 집. 내 엄마는 포근하고 따뜻한 사람이라 동네 아이들도 자기 엄마보다 내 엄마를 더 좋아했다.
하루는 친구네와 장을 보러 시장에 갔다. 사택은 시내에서 한 참 떨어져 있었는데 엄마들은 운전을 못하고 버스도 잘 안 다녀서 1시간 정도를 걸어 나가야 했다. 내가 잠시 꾸물거리는 사이 옆집 친구가 내 엄마를 쫒았다. 그리고 덥석 손을 잡으며 오늘은 내 엄마랑 손잡고 가겠단다.
'야 네 엄마 여기 있잖아! 내 엄마 내놔!'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는 엄마 손을 훔쳐오지도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부모님은 서로 다른 회사에 다녔고 두 분 다 주야교대 근무를 섰다. 그래서 집에 없을 때가 많았다. 두 분이 동시에 야간근무를 할 때면 나는 오빠 옆에 꼭 붙어서 자야만 했다. 행여나 밖에서 누가 우리 이름을 부르거든 귀신이니까 절대 대답도 하지 말고 문도 열어주지 말라는 아빠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면서. 그리고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창가를 등지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런 엄마를 내 옆에 누인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고 누운 채 나는 엄마의 가슴 옆 팔뚝살을 조물 거렸다. 엄마 팔뚝이 그 당시 내 슬라임이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어리광 부리며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가야 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엄마를 뒤로 한 채 나는 가방을 들쳐맸다.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했던 나는 이렇게 오래 떨어지게 될 줄 알았던 걸까.
1995년 내 나이 11살. 그 해 겨울쯤이었을까. 아빠가 아줌마 한 명을 소개해줬다. 좋은 분이라고 했다. 아줌마는 우리에게 먹고 싶은 거 없냐며 물었다. 오빠와 나는 몇 번을 만나는 동안 "아니요"라고 일관했다. 싫고 좋고는 모르겠고 그냥 그랬었다. 어쩌면 낯선 아줌마가 사준다는 과자를 덥석 물만큼 속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줌마는 아빠에게 애들이 왜 자길 싫어하냐고 물었나 보다. 다음날 아빠는 아줌마에게 살갑게 하라고 시켰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나도 썩 좋은 건 아니지만 아빠가 원하니까. 나는 아줌마에게 과자도 사달라고 했다. 오빠는 여전히 "아니요"만 하더라. 아빠는 나에게 아줌마를 엄마라 부르란다. 그래서 나는 또 금방 엄마라고 불렀다. 오빠는 엄마 소리가 그렇게 쉽게 나오냐고 나를 나무랐지만 나는 했다. 나도 엄마가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아줌마는 우리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원한 엄마는 아니었다. 아빠가 원한 아내도 아니었다. 아줌마가 원했던 남편과 자식도 아니었다. 우리는 다 잘못 만났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없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저는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10대를 보냈고, 감정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로 어른이 되었습니다. 몸만 자란11살 아이였죠. 배려와 존중, 소통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사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사람들과의 관계는 항상 어려웠고,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함과 고립감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는 이미 성인이었으니까요.
이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저는 스스로를 점점 초라하게 여겼습니다. 자꾸만 스스로를 탓하고, 남을 원망하게 되었고, 결국 과거에 갇혀 살았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나타나 나를 구해주길 바라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기대를 하면서요. 하지만 결국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백마 탄 왕자는 없다는 것, 내 삶의 주인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요.
그 후로 저는 하나씩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저의 결핍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뒤로 한 채, 지금을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건, 상처를 글로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향해 한 발 내디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나를 내가 돌보려 하지 않고 타인에게 의존하던 시절, 어릴 때 상처를 자주 얘기했었는데 불쌍한 척한다며 사람들 마음을 이용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저는 누군가를 이용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다들 자기 이야기를 하니까 저도 제 이야기를 했던 거였어요. 제 이야기는 이게 전부였으니까요. 하지만 듣는 이에게 그런 느낌을 준 것은 안타깝죠. 그래서 혹시나 독자분들에게 제가 감정팔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검열을 많이 했습니다. 글에도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했고요. 저는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보다 즐겁게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 길로 이끌어준 친구는 바로 책이었어요. 책은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저를 치유하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소중한 동반자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겪었던 성장의 여정과, 그 과정에서 함께했던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겸손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내 안에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나 자신과 화해하면서 진정한 나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며,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워가면서 조금씩 더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글은 제 개인적인 경험을 담고 있지만, 읽는 분들에게도 작은 위로와 영감을 드리고 싶습니다.
각 장에서 소개할 책들은 제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여러분도 자신의 성장 여정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저와 함께, 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시작해 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