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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Sep 19. 2024

향수

노트

*

여동생이 내 옷을 빌려 입는 날에는 아주 신신당부했다. “내 옷에 절대 향수 뿌리지 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지날 때는 그들이 뿌린 향수 때문에 숨을 참고 지날 때도 있었다.

다양한 브랜드의 향수들이 즐비한 백화점 1층은 가지도 않았다. 오묘하게 섞인 향들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났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만의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마다 향수 하나쯤은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시향을 시도하다가도, 마음에 드는 향기를 찾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나와버렸다. 본연의 향이 아닌 것들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싫었다.


이러던 나에게 그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에게 기억되고 싶은 향수를 찾기 시작했고 이제는 매일의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스타일링에 따라 각각 다른 향수를 뿌리고 있다.

향수의 기본 용어도 어느 정도 익혔을 정도로 향수를 고민해서 고르고 다양하게 고르고 있다.


많은 용어 중에도 제일 흔히 알고 있는 발향 단계를 나타내는 향수 노트.

사람들은 향수의 첫 향 톱 노트에 끌려 향수를 구매하곤 한다. 내가 향수를 고르는 기준은 무조건 미들 노트. 첫 향보다 나중에 발향되는 향이 혼미할 정도로 끌리는 향수가 있다.


**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첫 향은 오히려 별로에 가까웠다.

한 번, 두 번, 자꾸 보니 ‘한번 제대로 시향 해 볼까?’ 하는 정도의 관심이 생겼다.

내 기준에 맞는 미들 노트인지 확인해 보려던 찰나에 그는 이미 내가 정신 차리지 못하도록 자기라는 향기를 나에게 각인시키고 있었다.

내 일상 속 그는 나만의 향수가 되어 아주 오랜 시간 남아있었고, 내 코끝에는 이미 그의 향기가 맺혀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내 생활 속 베이스 노트가 되어 있었다.



조향사가 의도한 향이 발향되는 미들 노트.

남아있는 ‘잔향’이라고 불리는 베이스 노트.

내 곁을 맴돌던 이 조향사는 아무래도 성공한 것 같다.

그가 의도한 향은 나를 가뿐히 유혹했고 오랜 시간 잔향을 남기며 기분, 날씨, 스타일링과는 상관없이 나를 그에게 정착하게 했으니 대성공인 것 같다.


의도한 향이 나를 유혹 한 건지, 의도 자체가 유혹이었는지 물어보기에는 손끝이 간질거리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라는 향수는 평생 애용하고 싶을 정도로 은은하고 사랑스러우며 나와 무척이나 어울린다.



나를 감싼 모든 공간에서 풍겨오는 그의 향기가 오늘도 내 기분을 싱그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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