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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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차라리 완전히 잠겨 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오는 게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다. 수중의 깊이를 알 수 없기에 어디까지 내려갈지 예측할 수 없지만, 바닥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 바닥까지 얼마나 숨을 잘 참느냐, 중간에 포기하지 않느냐는 의지에 달렸다.
그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에게 화살을 돌릴수록 정작 가라앉는 건 나였다. 허우적거리며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그를 미워하는 건 내가 숨 쉬지 못하도록 누르고 또 누르는 행동이었다.
차라리 바닥까지 내려가 보자는 심산으로 그를 파고들었다. 끝없이 그를 생각하고 쉴 틈 없이 그를 꺼냈고, 필름이 닳고 닳도록 시간을 돌려보았다.
생각보다 깊었던 마음에 나는 꽤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했지만 끝내 바닥에 닿기를 성공했다. 양 발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선 마음과 마주했다. 그가 안쓰러웠다. 내 감정의 바닥에 왜 이토록 안쓰러운 모습의 그가 있는지 당황스러웠다.
당황스럽다는 표현조차 나의 이기심을 감추려는 못된 단어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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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용서를 구하길 바랐다.
그가 펼쳐주었던 큰 시간의 공간만큼 나 또한 마음의 공간을 넓혀 그를 품고 싶었지만, 내 마음은 옹졸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만 못 된 사람이었다. 먼저 시간을 갖자며 못되게 돌아선 뒤의 내 하루는 24시간이 아닌 240시간이 되어 있었고, 시계가 고장 난 사람처럼 정신을 흘려보냈다. 차라리 시계가 고장 났길 간절히 바랐다. 정작 시계는 너무 멀쩡했고, 내가 문제였다.
나는 괜찮지 않았고 그가 없는 내 시간은 화면에 나오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 숫자들을 불편하지 않게 나열하기 위해 부지런히 그를 원망했다. 일어난 상황에서 나를 배제시키기 위해 바쁘게 온갖 이유를 찾았다.
그가 없어야 행복할 것이라는 오만함으로 내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나서야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억울했다. 그를 아프게 한 건 바로 나였다.
무너진 그의 마음은 돌보지도 않은 채, 그 망가진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려는 것이냐며 이기적인 갑질을 부린 건 나였다.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의 일상이라는 시계를 고장 냈고 상황의 중심에 그를 홀로 세워둔 것에 대해, 그리고 그의 하루를 24시간도 아니고 240시간도 아닌 2400시간으로 만든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했다.
***
가라앉은 바닥에 양발을 딛고 그에게 다가갔다.
함께 위로 올라가기 위해 힘껏 그를 안았다.
나에 대한 미움은 오래전 모두 비워낸 것처럼
그는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