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옷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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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 위해 전날 찾아놓은 한적한 카페로 출발했다. 큰 도로 위 의문이 드는 시점에서 좌회전 안내가 나왔다. ‘이게 맞아?’ 하면서 좌회전을 하니 아주 고불고불 산길이 나왔다. 순간 무서운 마음이 올라왔지만 이내 새로운 길을 가보게 되었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겁과 무서움의 기준은 딱히 정해진 것이 없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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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이 예상되는 순간에도 겁나지 않았다.
다만, 철 지난 옷들을 당장 내일까지 정리해야만 하는 것 같은 막막한 짐스러운 감정만 가득 올라왔다. 몇 번 입지 않았지만 버리기 아까운 옷, 괜히 꺼냈다 싶을 정도로 먼지가 풀풀 날려 기침이 나는 옷, 이런 옷을 왜 입었나 할 정도로 촌스러운 옷, 그 정도로 화려한 옷.
거짓말이다.
겁이 났다.
그 사람과의 철 지난 계절 속에 새겨진 마음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미치게 겁이 났다. 우리 사이에 마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옷은 생각보다 많았다.
지금 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는 설레던 마음, 이 세상에 그 사람 하나뿐인 것 같았던 화려하고 색감 쨍한 마음, 죽일 듯이 미워했던 먼지 풀풀 날리던 마음, 그중에서도 가장 겁이 났던 건 이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 이상 이 마음 중 골라 입을 마음이 없다는 현실이 날 가장 겁나게 했다.
그와의 헤어짐은 매일 아침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던 내 일상과의 이별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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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입었어도 여전히 아끼는 옷이 있다. 아직도 이 옷을 입느냐며 체형 관리를 잘했다 칭찬받지만, 10년 전과 같은 체형이 아닌 10년이 지나도 변함없던 옷이라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가 나에게 준 마음은 한결같았다.
입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투정 부린 건 내 쪽이었다.
언젠가는 변한다.
그게 옷이든, 사람이든.
이 세상 무엇이든 언젠가는 변한다.
하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나였다.
겁이 난다.
마음의 옷장을 열면 정리하지 못한 그가 쏟아져 나를 다시 어지럽힐까 겁이 난다.
그대를 꺼내면 쉽사리 정리하지 못함에 괴롭습니다.
차라리 마음을 꺼내어 보는 게 낫겠다 싶어
잔뜩 구겨놓은 마음을 꺼내어 보면
기억도 나질 않는 곳에서 결국 그대를 발견합니다.
그대를 고이 간직해
차곡차곡 정리하면
너무나도 쉬이 그대를 꺼내볼까 두려워
오늘도 그대를 정리하지 못하고 포기합니다.
그대가 보고 싶습니다.
-戀愛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