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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타럽 Oct 12. 2024

볼 빨간 사추기(늙으면 어떡하지?)

39. 전생이 다람쥐인 사람들

 어느 계절이건 산행하기에 다 좋지만, 가을은 유독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그런데 가을에 산행할 때 차림이나 준비물은 저마다 다릅니다. 완벽하게 등산복 차림을 하고 천고마비의 계절답게 배낭에 잔뜩 먹을 것들을 넣어 가시는 분들도 있고, 늘 그렇듯이 간단한 운동복 차림에 물병만 가지고 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50+인 분들 중에는 비닐이나 집게를 들고 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비닐이나 집게를 들고 산행을 한다면, 흔히 플로깅(plogging: 조깅을 하면서 동시에 쓰레기를 줍는 행동)처럼 산행하면서 등산로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우려는 건가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그런 분도 간혹 계시지만, 대부분 그게 아니라 도토리를 주워 가려는 분들입니다. 

 물론 그렇게 주워 간 도토리를 가루 내서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으면 맛이 있을 겁니다. 요즘 마트에서 사 먹는 묵들은 모두 재료가 중국산인데, 그렇게 도토리를 주워 와서 묵을 쑤면, 완전 국산, 그것도 자연산 도토리묵이니까요. 그리고 예전에 먹을 게 귀하던 시절에는 도토리가 구황식품에 지나지 않았어도, 요즘은 도토리가 다이어트 식품이나 별미식품으로 인기가 높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청소년이나 젊은 사람들은 도토리를 주워가라고 해도 아마 안 할 거예요. '아니, 도토리묵이 먹고 싶으면 슈퍼마켓에서 한 모 사서 먹으면 되지, 그걸 뭐 번거롭게 주워와서 묵을 쑤냐'라고 할 겁니다. 더구나 도토리묵을 해 먹으려면 대체 도토리를 얼마나 많이 주워와야 하겠어요?      


 도토리는 반들반들한 얼굴에 모자를 쓴 듯한 모습이 다 똑같아 보이지만 어느 특정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참나뭇과 참나무속에 속하는 모든 나무들에 열리는 열매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가시나무에 열리는 열매들이 다 도토리라고 하는데요. 내 땅에 이런 나무들을 심어, 소위 '도토리 농사'를 지어 도토리를 수확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그냥 산에 가서 야생동물의 먹이인 도토리를 불법채취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해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국립공원뿐 아니라 동네에 있는 작은 산에도, 심지어 주민들이 자주 찾는 대학교 캠퍼스 동산에도, ‘도토리와 밤 채취 금지’라는 현수막이 내걸립니다. 운동을 위한 산행이나 걷기가 아니라, 인간 다람쥐가 돼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갖고 간 비닐이 터지도록 도토리와 밤을 주워가는 분들 때문입니다. 도토리와 밤만 무단채취하는 게 아니나 꼬챙이까지 들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쑤시는 바람에 자연이 훼손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 다람쥐’인 분들은 재미 삼아, 또는 별미를 즐기기 위해 도토리를 잔뜩 주워다 도토리묵 한 번 쒀 먹는 거지만, 야생동물한테 그 도토리들은 올겨울을 과연 무사히 넘길 수 있느냐 없느냐, 생사가 달려 있는 소중한 식량입니다. 실제로 그런 ‘인간 다람쥐’ 분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는, 몇 년 전에만 해도 쉽게 눈에 띄던 다람쥐나 청설모가 다 사라지고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임산물을 무단 채취하는 행위는, 실상 엄연한 절도행위이자, 야생동물의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없애서 생태계를 해치는 불법 행위입니다. 야생동물들이 겨울을 나면서 먹어야 할 먹이를 그렇게 '인간 다람쥐'들이 싹쓸이해 가면, 야생동물들은 제대로 겨울을 날 수 없고, 심한 경우 굶어 죽는 일도 벌어지거든요. 그런가 하면 먹이가 부족해진 동물들이 민가로 내려오면 농작물을 망치거나 전염병을 옮길 우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일부 지자체에선 현장 순찰과 단속뿐 아니라, 등산객들이 무심코 주운 야생 열매를 반납할 수 있도록 ‘야생 열매 수거함’을 만들어 동물들에게 돌려주고 있는데요. 여전히 '인간 다람쥐' 분들은 ‘나 하나쯤 주워가는 건데’, ‘고작 한 봉지밖에 줍지 않았는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시나 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아야겠습니다.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 피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이 시의 경우는 나 하나라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지만, '인간 다람쥐' 분들이 나 하나 고작 도토리 한 봉지 주워가는 걸로 생각하는 도토리 무단 채취는, 결국 그곳의 생태계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는 거지요.

     

 'LNT'는 미국 국립공원 환경단체의 주도로 시작된 환경 운동입니다. ‘Leave No Trace’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흔적 남기지 않기’라는 뜻입니다. 'LNT'는 모든 야외 활동에서 사람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지침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하기. 둘째, 지정 구역에서 산행과 야영하기. 셋째,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넷째, 배설물이나 쓰레기를 정해진 방법으로 처리하기. 다섯째, 모닥불은 최소화하기. 여섯째, 야생 동식물을 존중하기. 일곱째, 타인을 배려하기입니다. 도토리 등 야생 열매를 무단채취하는 분들에게 이 지침을 좀 알려주고 싶네요.     


 아무리 전생이 다람쥐였는지, 또 다음생에 다람쥐로 태어나기로 작정을 했는지, 도토리만 보면 주워오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든다고 해도, 자연환경을 위해 떨어져 있는 도토리 한 알조차 그 상태 그대로 두고 와야 합니다. 산에 갈 때는 내가 가지고 간 것을 버리지도 말고, 산에 있는 것을 가져오지도 말고, 내가 왔다 간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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