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겨울 하늘을 감동으로 수놓는 기러기떼
2022 카타르 월드컵 기억나시나요? 그때 우리 태극전사들은 12년 만에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일궈냈습니다. 세 번째로 월드컵에 출전하는 손흥민 선수는 주장이 돼서 주장 완장을 팔에 두르고 그라운드를 누볐는데, 안와골절 부상 때문에 마스크까지 쓰고 고군분투해야 했지요. 하지만 자신의 부상보다 다른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애쓰면서, 끝까지 다른 선수들을 믿어주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서 ‘역시 캡틴은 다르다’, ‘역시 슈퍼 히어로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2023 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에서도 손흥민의 포용력은 한국팀을 넘어 다른 팀에도 큰 울림을 줬습니다. 손흥민은 자신의 월드 클래스 기량뿐 아니라 여러 방법으로 구성원이 똘똘 뭉치는 응집력을 발휘하도록 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16강전에서 손흥민은 동료들에게 이렇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고 합니다. "실수해도 동료들이 있다. 동료들, 형제들, 가족들이 있다고! 그거 믿고 가서 쟤네 조용하게 해 주자! 쟤네 4만 명, 5만 명? 오라 그래! 우리가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운동장 안이니까 들어가서 부수자고!" 그래서 8강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4강에 오른 우리 팀을 두고, '한국은 경기력이 좋지 않은 가운데 차이를 만들어 결과를 냈다'면서 일본 축구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선 손흥민 같은 절대적 스타가 필요하다고 콕 집어 조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태극전사들을 보면, 저는 ‘V’ 자 대형으로 겨울 하늘을 수놓는 기러기떼가 연상됩니다. 겨울에 오후 4시 넘어 강변북로를 달리다 보면 차창 밖으로 기러기들이 ‘V’ 자 대형을 이뤄 어디론가 열심히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여섯 마리가 만드는 작은 ‘V’ 자부터 수십 마리가 만드는 커다란 ‘V’ 자까지, 해지기 전 하늘을 수놓는 기러기들의 움직임이 하도 장관이어서, ‘차라리 길이 많이 막히면 좋겠다, 그러면 저 장관을 좀 더 오래 쳐다볼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러기들이 줄지어 날아가는 것을 ‘안항(雁行)’이라고 합니다. ‘안항(雁行)’이라는 말은 의좋게 날아다니는 기러기들처럼 다정한 형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러기떼가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에서 예와 우애를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맨 앞에서 V자 대형을 이끌고 가는 기러기는 이른바 ‘주장 기러기’입니다. ‘주장 기러기’가 앞장서 날면서 바람을 막아 날갯짓을 하면 상승기류를 만들어지고, 그 상승기류는 뒤따라 날고 있는 기러기들이 맞바람의 저항을 덜 받고 힘을 아끼면서 훨씬 쉽게 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V자 대형을 해서 날아가면 혼자 날아갈 때보다 70% 정도 더 멀리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혹시 기러기들이 날아갈 때 내는 요란한 울음소리를 들어보셨는지요? ‘주장 기러기’뿐 아니라 V자 대형을 이뤄 날아가는 ‘팀원 기러기’들도 모두 쉬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는데, 울음소리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바로 ‘힘내!’, ‘기운 내자!’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소리거든요. 또 만약에 어떤 기러기가 뒤쳐져 날 수 없게 되면, 힘센 기러기 둘이 도와 함께 땅으로 내려가서, 낙오한 기러기가 체력을 회복해 다시 대열에 합류할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해요. 정말 대단한 팀 정신 아닌가요? 마찬가지로 앞에서 주장 역할을 하던 기러기가 지치면, 스스로 대형 뒤로 물러서고, 뒤따르던 기러기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그러다 그 기러기도 지치면 또 다른 기러기가 앞으로 나와 V자 대형과 속도를 유지합니다.
조선 후기 일상 속 여인들의 지혜를 담은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기러기는 네 가지 덕목을 갖춘 새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추우면 북으로부터 남형 양에 그치고 더우면 남으로부터 북안문에 돌아가니 신(信)이요, 날면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화답하니 예(禮) 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節)이요, 밤이 되면 무리를 지어 잠을 자되 한 마리는 경계를 하고, 낮이 되면 입에다 갈대를 머금어서 그물을 피해 가니 지혜(智惠)가 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기러기의 덕성(德性)을 본받아 혼례를 올릴 때 신랑 측에서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신부의 집으로 가지고 갔고, 이때 기러기를 나르는 사람을 '기럭아비'라 불렀습니다.
기러기는 전 세계에 14종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큰 기러기를 비롯해서 흑기러기, 쇠기러기, 개리, 회색기러기, 흰 이마기러기, 흰기러기 등 7종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 중 큰 기러기, 흑기러기, 개리, 흰 이마기러기는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겨울 하늘을 감동으로 수놓는 기러기떼들이 이 땅에서 잘 먹고 건강해져서, 앞으로 매년 겨울이 되면 더 많이 우리나라를 찾아와서 더욱 깊은 감동을 안겨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나만 잘났다’, ‘나만 잘 살겠다’가 아니라, 이런 기러기들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면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월드컵과 아시안컵 등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면서 열심히 싸워 멋진 경기를 펼치는 태극전사들처럼, 우리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남을 헐뜯거나 결과에만 연연해하지 말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면서 각자 나름대로 멋지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