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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타럽 Oct 15. 2024

볼 빨간 사추기(늙으면 어떡하지?)

56. 나이 유감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양력 1월 1일에 새해 인사를 했으면서도 음력 1월 1일인 '설'이 되면 전통풍습대로 "새해 복 만이 받으세요"라고 새해 인사를 한 번 더 하지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새해가 된 지 한 달여가 지난 마당에, 다시 "해피 뉴 이어"라고 하는 셈이니까 이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나이도 우리 전통풍습대로 특별하게 세는 우리만의 나이가 있습니다. 물론 지난 2022년 국회에서 민법과 행정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면서, 2023년 6월부터 국내 사법관계와 행정 분야에서 나이를 세는 기준은 '만 나이'로 바뀌었지만(단 주류·담배·병역·취학 관련은 연(年) 나이로 적용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오래된 우리 전통풍습대로 새해가 되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느낌이 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나이가 '만 나이'로 통용되기 전에는, 다들 해가 바뀌어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나이 한 살 더 먹는 걸 미루다가, 설이 지나면 비로소 ‘꼼짝없이 한 살 더 먹었다’는 느낌을 갖곤 했었습니다. 예로부터 설에 먹는 떡국은 나이와 복을 더해 주는 음식을 상징했기 때문에, 설날에 떡국을 먹으면 나이 한 살을 먹는다고 여겼던 거지요.  

  

 그러다 보니 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너, 몇 살이냐?”라고 물을 때 답을 세 가지나 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만 나이'입니다. '만 나이'는 태어난 순간 ‘0살’로 시작해서 매년 ‘생일’이 지날 때마다 한 살씩 더해지는 나이입니다. 두 번째는 태어난 순간 ‘0살’로 시작하는 건 '만 나이'와 같지만,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한 살씩 더해지는 ‘연 나이’입니다. ‘연 나이’는 법 집행의 편의를 위해 병역법, 청소년보호법 등 일부 법이나 규정에 적용되는 나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세는 나이’, 이른바 ‘한국식 나이’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나이를 먹어 ‘한 살’로 시작해서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한 살씩 더해지는 나이입니다. 그래서 생일이 늦은 분들은 우리 나이가 연 나이보다 한 살 많고, 만 나이보다는 두 살이나 많아서, 우리 나이를 말할 때 많이 억울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이 셈법이 여러 가지이다 보니,  통일되지 않은 데서 오는 불편함 등을 이유로 우리 '한국식 나이'를 없애자는 얘기가 나오게 됐고, 결국 국내 사법관계와 행정 분야에서 나이를 세는 기준이 '만 나이'로 바뀌게 된 건데요. 사실 우리 나이 셈법은 참 심오한 셈법입니다. 우리 나이 셈법은 엄마 뱃속에서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거쳐 번듯한 사람, 태아로 탄생하기까지 소위 열 달 동안의 시간을 소중한 나이 한 살로 의미를 부여한 셈법이거든요. 뱃속 태아의 생명을 소중하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대접한 셈법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우리 나이 셈법의 심오함은 뒷전으로 처진 채, 나이를 말할 때 이왕이면 좀 더 어리게 '만 나이'로 말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또 비록 ‘립서비스’여도 원래 생물학적 나이보다 훨씬 아래로 봐주면, 마치 정품을 할인가에 구입할 때처럼 좋아하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만 해도 삼강오륜의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가 사회적 기본 규범으로 통용되던 때라서, 남자들은 은근슬쩍 나이를 올려 부르기도 했고, 심지어 술자리에서 언쟁을 벌이다 기분이 나빠지면 서로 "민증 까봐!(주민등록증 보자!)"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자기가 형이라고 우겨대니, 주민등록증에 기록된 생년월일을 확인해서 누가 형뻘이고 누가 아우뻘인지 확인하자는 절차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과 아우의 순서가 정해지면 논쟁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아우가 형의 말을 듣고 머리를 수그리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요. 게다가 예전에는 부모님이 출생신고를 늦게 한 분들도 많아서 실제 나이보다 주민등록 나이가 훨씬 어린 분들도 많았습니다. 요즘은 이런 분들이 실제 나이보다 정년을 늦게 맞게 되니까 오히려 좋아하게 됐지만, 예전에는 실제 나이보다 어린 대우를 받는다고 섭섭해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이 든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 풍토는, 나이만 먹고 성숙하지 못한, 마치 나이가 벼슬인 양 행동하는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는 폐단과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민주와 평등이라는 이념이 확산되면서, ‘장유유서’는 더 이상 우리 사회에 덕목이 아니라 ‘개뿔 같은 소리’로 전락해 버리게 된 거지요. 더욱이 산업화과정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청춘 예찬 시대’를 넘어 이제는 ‘청춘 찬양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박범신의 소설 ‘은교’를 바탕으로 정지우 감독이 만들어 2012년에 개봉한 영화 ‘은교’에서는, 노(老) 시인 이적요가 이런 대사를 날립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예전에 나이대접 때문에 나이 많은 걸 좋아했듯이, 현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무조건 청춘을 좋아하고, 늙음을 형편없게 여기는 것을 지적하는 대사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우리나라 국민들의 평균수명과 기대수명이 갈수록 길어지면서, 생물학적 나이에 비해 외모라든가 건강상태, 사회적인 활동 등이 예전 그 나이의 이미지와 점점 괴리되는 현상이 빚어지게 됐는데요. 가령 생물학적 나이는 60대이지만, 주름살 없는 외모는 족히 열 살은 넘게 어려 보이고, 건강상태도 4,50대 못지않은 체력을 유지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만 해도 환갑잔치를 하고, 2000년대만 해도 칠순잔치를 했는데, 백세시대인 요즘은 환갑잔치 하는 분들은 전혀 없고, 칠순 때도 잔치보다는 평소 생일처럼 보내면서 대신 해외여행 등을 비롯해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백세시대’를 지나 소위 ‘백 20세 시대’를 넘보게 되니까, 이젠 우리 사회에서도 10여 년 전 초고령사회인 일본에서 통용되던 ‘곱하기 0.7세 나이’의 논리가 공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생활하는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에 0.7을 곱한 나이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올해 54세인 분들은 54 곱하기 0.7 해서 38세의 마음으로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고 산다는 겁니다. 어떠세요, 지금 50+인 분들 그렇게 살고 계신가요? 0.7 곱하기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0.9 곱하기 정도로는 생활하고 계신가요? 


 지금까지 여러 나이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우리 전통 셈법으로 한 나이, 만 나이, 연 나이, 그리고 생물학적 나이에 0.7을 곱한 나이, 이 중 어느 나이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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