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밴쿠버 건축회사,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다.

이민1세대의 당돌한 실무 이야기-회사

by 구워홀러

성인이 되어 캐나다에 온,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이민자가 밴쿠버 로컬 건축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보통 이런 류의 글은 '영어 프레젠테이션 팁'이라거나 '대중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잘하는 법' 등이어야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사람의 불만족스러웠던 프레젠테이션 후기를 남겨본다. 영미권 국가의 로컬회사에서 영어로 일하는 한국인인 나를 두고 '평범한 사람'인가?라고 질문한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요, 평범하지는 않습니다.'일 것. 그렇지만 캐나다는 이민자들이 무척 흔한 사회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평범함을 부여해 본다.


사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 글을 쓰지 않으므로써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던 그날의 기억을 최대한 빨리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외국 회사에서 외국어로 대중 발표를 하게 되는 누군가를 위해, 또는 이미 그 프레젠테이션을 끝내고 이불킥을 차고 있는 사람을 위해 나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우리 회사는 한 달에 한 번 회사 자체 Lunch & Learn 세션을 갖는다.


보통의 Lunch & Learn은 건축•건설 관련된 회사가 영업을 목적으로 건축회사 또는 디벨로퍼(건축주) 회사를 방문하여 자재를 소개하고, 그 재료와 관련된 건축 전문 정보와 건설 공법을 강의한다. 점심시간에 이루어지고 식사까지 제공하기 때문에, Lunch & Learn 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캐나다 건축협회는 이것을 세미나로 간주하여, 협회 회원들에게 세션 당 1학점을 인정해 준다. (해당 주 건축 협회 회원은 세미나 등에서 필수 이수 학점을 채워야 한다.)


사내 Lunch & Learn도 구성은 비슷하다.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이루어지며, 내용은 '회사의 프로젝트들 진행 상황 업데이트’, ‘설계 단계에 있는 프로젝트 디자인 분석', '실무적으로 공유하고 싶은 아이템들과 노하우 소개', ‘변화되는 산업 내 새로운 개념들 소개 (AI, BIM 등)’, 그리고 ‘개정된 건축 법규 소개’ 등이다.


2025년 6월의 사내 Lunch & Learn은 우리 팀이 담당했고, 주내용은 프로젝트 매니저가 전담하는 양로 시설 프로젝트 (Long-term Care) 들의 전반적인 소개였다. 단, 이중 한 프로젝트가 모든 컨설턴트들과 Revit으로 협업하는 특징 때문에, 그의 프레젠테이션 안에 나의 작은 프레젠테이션이 할당되었다.




대중 앞에서 이야기할 때, 잘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한다면•친한 친구들 앞이라면•친구들이 아닐지라도 다소 캐주얼한 자리라면, 그 프레젠테이션의 긴장감은 무척 줄어든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대학생 때 여러 과목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야 했는데 그중 80명 앞에서 두 번 발표한 적이 있다. 한 번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팀장으로 지목되었는데, ‘팀장들은 앞으로 나와 포부를 말하라’는 자리에서 벌벌벌 떤 적이 있다. 반면에 내가 완벽하게 준비한 것을 10분 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전혀 떨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쇼의 진행자처럼 발언을 재밌게라든지, 관중을 사로잡는다라든지 전혀 하지 못 했었다. 캐나다 유학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밴쿠버 로컬 건축가 한 명을 선정해서 반 친구들 앞에서 소개하기’, ‘디자인 스튜디오 과제 소개하기’ 등 나는 목소리를 떤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나는 청중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진행자는 아니었다.

취업 후 친한 친구들 앞에서 자유 주제 발표하기 때에도 동일했다.

아무튼 ‘준비가 어느 정도 되었다면, 떨지 않는다’는 나만의 법칙(?)과 회사 Lunch & Learn는 다소 캐주얼함에도, 캐나다 사회생활의 첫 프레젠테이션인지라 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감은 더해갔다. 틈틈이 소리 내어 연습을 하고, 발표 전날에는 집에서 열 차례 모의 발표를 했다. 프레젠테이션 당일은 회사 소모임실에서 실전인 것처럼 연습했고, Lunch & Learn 직전에는 비상 계단실에서 암기하다시피 대사들을 읊었다. 이렇게 연습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발표장에 들어간 순간 50여 명의 동료들로 꽉 찬 공기에 나는 긴장감을 다시 느꼈다.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했는데, 아래와 같았다. (최악순)


1. 기절, 급격한 스트레스로 Pass-out

2. 도망, ‘I am so sorry guys, but I cannot do this today.’라고 말하며 자리 이탈 (Walk away)

3. 프레젠테이션 내내 목소리 떨림

4. 목소리는 떨리지 않지만, 마우스를 잡은 손이 벌벌 떨림


12시 정각 프레젠테이션은 시작되었다. 매니저가 켈로나에 거주하기 때문에 원격으로 발표하는 동안 나는 ChatGPT에서 알려준 긴장감 완화시키는 ‘가슴을 활짝 편 상태로 꼿꼿이 앉아있기’ 동작을 유지했다.


곧이어 내 프레젠테이션 차례가 왔다.


연습 때 체크했던 시간과 비슷하게 본 발표도 15분이 조금 넘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간 동안 내 목소리의 떨림은 없었다. 또한 마우스를 잡은 손 역시 떨지 않았고, 아주 종종 발표하며 청중들을 쳐다보기도 했다. 사실 'If my voice starts shaking, please bare with me.'라고 오프닝 할까 싶었지만, 나는 회사에서 조용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자칫 썰렁해질 수도 있는 멘트 대신 본래의 진지함을 유지하기로 했다.


전반적으로 목소리나 몸이 떨진 않았고, 내가 잘 아는 것을 설명하는 자리였음에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식의 프레젠테이션은 아니었다. 청중을 편안하게 하거나, 전혀 휘어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 능력은 노력으로 가질 수 없는 천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현실 안주 태도에 ‘될 때까지 연습해 봤어?’, ‘1천 번씩, 1만 번씩 연습해 봤어?’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불만족스러운 프레젠테이션 결과물을 받아들인다.




점심시간 이후 한 동료가 내 책상으로 찾아와 Revit 모델링을 잘했고 발표도 잘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인사담당자는 퇴근 전 사내 메신저로 칭찬 문자를 보내왔지만, 이 피드백들은 낙심한 나를 전혀 달래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냐, 동의하지 않아. 나 오늘 정말 못 했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이러한 반응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므로, 대신에 나는 큰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렇다면 나는 만족스럽지 않은 대중 프레젠테이션을 두고 계속해서 이불킥을 찰 것인가?


한 번은 한국의 대학교에서 영문과 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이 늦게 강의실을 들어온 적이 있다. 교수님은 요일을 착각하셨다며 당신의 지각을 사과하셨다. 그리곤 당신이 늦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개의치 않겠지만 본인은 너무 창피하다는 것과 이 말을 덧붙이셨다.

오늘 저녁, 아무도 내가 강의에 지각했던 것을 다시 꺼내 생각하지 않으리라 너무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계속 부끄러워할 것이다.

교수님이 이 말을 하시지 않았다면, 그날은 나에게 보통의 하루였을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불킥 찰 일이 있을 때마다 위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의 사소한 실수를 목격한 어느 날, 그날의 저녁 나는 그 실수와 실수를 만든 장본인에 대해 기억할까? 또 영어에는 Too hard on oneself라는 표현이 있는데,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것을 뜻한다.


굳이 차지 않아도 될 이불킥을 계속 차는 중이라면, 조금 더 뻔뻔해지도록 하자. 그리고 기억하자. 나는 캐나다 밴쿠버의 자랑스러운 이민 1세대라는 것을!

keyword
이전 11화밴쿠버 건축회사, Revit의 장점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