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티에 샷을 추가하는. 달콤함에 쓴 걸 부어버렸다.
여러분들은 '아샷추'를 아시나요?
야삿추는 아이스티 + 아메리카노 샷 추가를 의미하는 줄임말입니다.
아이스티에 샷 추가라니,
먹어보셨던 분들은 익숙하시겠지만
처음 들어보신 분들은
굳이 왜? 라고 생각하실 거 같습니다.
저 역시도 이 음료를 처음 접하였을 때는,
아이스티는 아이스티대로,
아메리카노는 아메리카노대로 즐기는 것이
더 맛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행은 생각보다 꽤 오래 가고 있는데요.
그렇다는 것은, 대중의 입맛에 맞다는 말이겠지요.
저는 아샷추를 좋아합니다.
달콤함이 짙은 아이스티에,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섞으면
과연 중화될까요?
아니면, 각각의 맛이 혼동이 될까요?
'아샷추' 라는 단어만 들었을 떄,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셨나요?
저는 아샷추를 처음 접하였을 때,
아이스티가 아닌,
진하고 진한 샷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무리 달더라도,
짙은 쓴 아메리카노 원액이 들어가게 되면
달콤함이 쓴 맛에 먹히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 달리
달콤한 아이스티에
쓰디쓴 샷이 중화되어
굉장히, 적절한 단 맛이 된
음료가 되었습니다.
달콤한 설탕물에 짙은 쓴 맛이
오히려 겉돌지 않고
스며든 것입니다.
너무나 단 음료를 잘 먹지 못하는 제게,
너무 쓴 것을 먹기는 싫었던 저에게
그런 중화된 맛이
참 반갑게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스티를 먹을 일이 생기면
아샷추를 찾아 주문하고는 합니다.
아샷추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처음에는 아메리카노에 설탕 시럽을 넣으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는데요.
하지만,
맹 - 하지만 짙은 시럽을
넣게 되면 아메리카노가 달콤해지는.
묘한 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아메리카노의 쓴 맛은 온데간데 없고,
쓰지 않은 달콤한 설탕물이 되어버립니다.
나는 분명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지만,
그 내용물은 설탕이 지배하고 있게 됩니다.
물론, 아메리카노의 향과 함께 섞여버리는
설탕 시럽의 맛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쓰디쓴 것이 너무나 짙어진 날에는,
달콤함의 시럽으로 뒤덮여버리고 싶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아샷추는 적당함의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스티라는 단 맛에 샷이 들어가며
아메리카노의 적절한 쓴 맛과
향이,
아이스티의 달콤함과 만나
자연스럽게 중화가 됩니다.
아샷추를 먹을때면,
제 인생의 맛을 매긴다면
이렇게 너무 쓰지도, 너무 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세상에 단 맛만 나는 삶을
없단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지요.
이가 썩을만큼 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그렇다고 쓰디 쓴 샷의 원액처럼
쓴 맛으로 뒤덮인 맛은 싫기 때문에.
그러한 삶은
감정의 원액을 삼키기에
너무나 힘들 거 같기 때문입니다.
적절하고 중화된 삶.
그러한 삶일 때,
어쩌면 그러한 태도일 때
삶을 이겨내기에 적당한 거 같습니다.
너무 달면 달콤한 것에 중독될 것이고,
쓴 맛만 느끼는 삶이라면 쓴 맛에 잠겨버릴테니까요.
아샷추와 같이
극과 극이 조화되더라도,
둘의 장점만이 살아난 것처럼.
제 삶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에서 쓴 맛도.
고통만 남는 것이 아닌 고통 속에 얻은
깨달음만 피어나기를.
깨달음의 짙은 쓴 맛이 아닌, 짙은 향만이
스며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조화로운
은은한 단맛을 즐기고 싶습니다.
글쎄요,
이건 아샷추만의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샷추를 가지고 싶나요?
아이스티에 커피를 붓는다.
휘휘, 저어본다.
중화되기를 바라면서.
단 맛과 쓴 맛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를 바라며.
쓴 맛에 사로잡히지 않고,
단 맛에 사로잡히지 않는
적당하고 알맞는
맛이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휘 저은 맛에
빨대를 꽂는다.
빨대를 타고,
적당하게 흐르는 단 맛을 섭취한다.
옅지만 존재가 강한
아메리카노의 맛도 함께한다.
내 인생도 조금만 쓰면 좋겠다.
너무나 단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옅지만 진한 아메리카노 정도의 상처는
지금도 충분하니까.
그렇게 중화된 음료를 한 모금
한 모금, 두 모금.
어느새 비워진 음료.
다음에도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