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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이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8-1819)

by 유상현 Feb 26. 2025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메두사호의 뗏목 (The Raft of the Medusa)

- 작가 : 테오도르 제리코 (Théodore Géricault)

- 제작시기 : 1818-1819년

- 전시장소 : 파리 루브르 박물관


1815년 나폴레옹의 실각 후 프랑스는 왕정복고로 다시 국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사회는 혼란하고 부패했다. 1816년, 프랑스에서 세네갈로 향하는 군함 메두사호가 모래톱에 좌초하여 침몰하고, 약 400명의 탑승자는 구명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물론 보트에 자리가 허락된 이는 소위 "높으신 분들"이었고, 보트에 자리를 허락받지 못한 150여명은 뗏목을 급조해 보트에 연결하였다.


무거운 뗏목을 달고 속도를 내지 못하자 선장은 밧줄을 끊어 뗏목을 버렸고, 그렇게 망망대해에 버려진 150여명은 금세 식량이 바닥나면서 더위와 굶주림에 정신을 놓게 되었다. 실성하여 바다로 뛰어든 사람, 힘이 없어 바다로 떠밀린 사람, 하나둘 낙오자가 생기며 인원은 점점 줄었고, 급기야 굶주림에 미친 사람들은 서로 살생하고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른다. 표류 13일째, 뗏목에 남은 인원은 1/10인 15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구조선에 발견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마저도 구조선의 목적은 인명구조가 아니라 메두사호에 남은 상품과 재화를 회수하기 위함이었는데, 그야말로 우연히 발견되어 목숨을 구했다는 말도 있다.


부르봉 왕가가 부활한 직후의 참사다. 사람들은 왕정의 침몰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당연히 "높으신 분들"은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메두사호의 비극이 잊혀져가던 중 1819년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그림이 등장했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는 무명이었다. 그가 살롱전에 출품한 <메두사호의 뗏목>은 가로 5m, 세로 7m에 달하는 초대형 작품이다. 기존에 이 정도 크기의 회화 작품을 채우는 주인공은 성서 속 인물이나 신화의 영웅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제리코는 그 자리를 사지로 내몰린 이름없는 사람들과 시신으로 채운 것이다. 게다가 당시 부르봉 왕가가 감추고 싶었던 참사를 고발하고 있으니, 이 그림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입에 담지 못할 험한 평가가 뒤따랐다.


제리코는 1816년의 참사 소식을 듣고는 이 주제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하였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생존자를 직접 찾아가 당시 상황을 인터뷰했고, 시신을 정밀하게 그리고자 영안실에서 시체를 구해 관찰하기까지 했다. 구조선에 발견되기 직전 마지막 장면을 그리기로 정한 뒤에는 인물을 배치와 포즈를 연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외젠 들라쿠르아 등 그의 동료 화가가 직접 포즈 모델이 되어 작품을 도운 것은 유명한 일화다.


<메두사호의 뗏목>이 탁월한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은, 기득권의 부패를 고발하는 용기뿐 아니라 그것을 가장 완성도 있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연출력이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의 내용은 실화지만, 그림 속 인물들(죽은 자를 포함하여)의 배치와 몸짓 및 표정은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구조선을 발견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쥐어짜는, 다시 말해서 감정이 극대화되는 순간이 담겨있다.

이러한 감정의 전달을 위해 제리코는 피라미드식 형태로 인물을 배치한다. 가장 낮은 곳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 그리고 죽은 아들을 붙잡고 넋을 놓은 무기력한 생존자가 있다. 중간층에는 간신히 손을 뻗어보지만 기력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가장 높은 곳에는 힘차게 옷가지를 흔들며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는 이들이 있다. 마치 감정의 밑바닥에 있는 무기력과 상실감에서 점점 끌어올려 희망을 분출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정점에 있는 이가 흑인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세네갈에 가는 군함이었으니 당시 시대를 고려하면 흑인은 노예일 확률이 높다. 가장 미천한 신분계급의 인물이 가장 높은 곳에서 구조를 갈망하는 아이러니까지 한 장면에 응축한 셈이다.


참 굉장한 그림이다. 무명의 젊은 화가 제리코가 이룩한 성취의 근원은 "사람"이다. 이름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의 경험에 바탕을 두었고, 평범한 사람의 몸짓과 그들이 교차되는 구도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격렬한 찬반 논쟁과 악평 속에서도 이 작품의 가치가 인정받고 루브르 박물관에 걸릴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오는 감동의 힘일 것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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