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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 병(病)?

퇴직 후

by 백승인

퇴직을 앞두고 우연히 듣게 된 법륜 스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하면 연금을 받으니 넉넉하진 않겠지만 크게 먹고살 걱정은 없을 테고, 평생 나라 덕분에 먹고살았으니 최소한 3년 정도는 돈 벌 생각하지 말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지내세요."


나도 퇴직하면 돈 벌 생각하지 말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면서 살자고 생각했다. 퇴직 후 아내는 수입이 줄어든 것을 걱정하면서도 내게 돈을 벌어 오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30년 넘게 고생했다며 격려했다. 나는 퇴직 후 동갑내기 동료들과 함께 사무실을 얻어, 책을 읽고 당구 게임을 하며 펜 드로잉을 배우는 등 한가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를 구성하는 동대표를 새로 선출한다는 공고문을 보았다. 법륜 스님 말씀처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임기도 2년이면 적당했다.

아내에게 말했다.

"나, 동대표에 나가볼까?"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확실히 앞에 나서는 거 좋아해. 이왕 하려면 아예 회장을 하지 그래요?"

아내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 수년간 반장을 맡았던 걸 빗대어 평소 ‘반장 병(病)’이 있다고 놀렸다. 실제로 퇴직 후에도 이런저런 일을 앞장서서 하는 걸 보면 부정할 수도 없다.

동대표 후보로 등록했는데, 다른 동은 후보자가 한 명뿐이라 찬반을 묻는 투표를 하는데 우리 동만 두 명이 출마하면서 경선 투표를 했다. 상대 후보는 30대 외제차 딜러로, 그의 선거 포스터를 보고 놀랐다. 마치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 선거 포스터처럼 멋진 전신사진과 굵직한 글씨의 공약이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칼라였다. 확실히 젊은 사람의 감각이 뛰어났다. 반면 내 포스터는 아파트 선관위에서 정한 양식으로 흑백으로 인쇄된 이력서와 비슷한 형태이다.

‘이건 해보나 마나 졌네.’ 포기할까 고민하는데, 아내가 이왕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 한다며 만류했다.

며칠 뒤, 관리소장이 동대표로 선출된 것을 축하한다고 전화했다.

망신을 피했다고 안도하는데 동대표 회장이 연락해 왔다.

“축하합니다. 이력을 보니, 백 선생께서 회장을 맡으시는 게 아파트를 위해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 선출된 동대표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내가 회장직을 맡기로 했고 입주민 투표를 거쳐 공식적으로 회장이 되었다. 나는 회장 후보 등록을 하고 개표결과가 나오기 전에, 아파트 관리규약과 각종 규정의 개정안을 만들었다. 관리규약은 몇 번 개정됐는데, 10개 남짓한 규정은 아파트 입주 이후 10년 가까이 단 한 차례도 개정된 적이 없다. 나는 회장 임기를 시작한 후 가장 먼저 아파트 관리규약과 각종 규정 개정안을 동대표들과 협의했다. 이어서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조정하여 3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관리규약과 각 규정의 개정안을 공포했다.


관리규약과 각종 규정을 개정하고 나서 추진한 것은 작은 도서관 활성화였다. 각종 규정을 개정하는 것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작은 도서관 활성화는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다. 도서관은 관리동 2층,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보이는 곳에 있어 접근성이 좋지만,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1년 내내 문이 닫힌 상태였다. 내부에 들어가 보니 서가보다 바닥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책이 더 많았다. 전임 회장이 다른 곳에서 폐기하는 걸 얻어왔다고 하는데 20년 이상된 것이 수두룩했고, 그나마 볼 만한 책은 입주 당시 구입한 것이다.


도서관을 개방하려면 상근자가 필요했다. 약간의 수당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했으나, 지원자는 한 명뿐이었고 그나마 적격자가 아니었다. 자치구 노인일자리센터에서 작은 도서관 근무자를 지원하는 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요청한 결과 2명의 인력을 지원받아 어렵게 해결했다. 신간 도서를 구입하기 위한 예산을 반영하고, 지자체 도서관과 연계해 폐기 예정 도서 중 상태가 좋은 책을 기증받았다. 오래된 도서를 과감하게 정리하여, 관리동 앞마당에 펼쳐놓아 원하는 입주민들이 가져가도록 했고 남은 것은 폐기했다. 회장 업무추진비 일부를 활용해 상금을 걸어 도서관 명칭을 공모하고, 선정된 이름으로 현판을 제작해 걸었다.

또한 도서관 근무자 의견을 반영해 열람용 탁자, 의자를 다시 배치하고 작은 화분을 들여놓자 분위기가 더욱 화사해졌다. 변화는 금세 나타났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하굣길에 들르기 시작했고,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들과 부모가 찾아왔다. 퇴직 후에는 한가롭게 지내리라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또 일을 벌였다. 아무래도 내게는 확실히 ‘반장 병(病)’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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