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퇴직 후, 나는 예전 동료들과 함께 작은 사무실을 열었다. 각자의 길을 가던 우리는 다시 한 공간에 모여 일상을 나누고, 함께 했던 시간을 되새기며 여유를 즐겼다. 그러던 중 ‘지방행정동우회를 설립하여 회원 간 친목을 도모하고 국가 발전과 사회 공익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지방행정동우회법』이 전년도에 제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퇴직 공무원들이 오래전부터 자생적으로 친목단체를 운영해 온 지자체가 있었는데, 이를 법정단체로 제도화한 법률인 것이다. 중앙회 아래 광역 및 기초지자체별로 각각 지회와 분회를 두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자체적으로 운영한 친목단체가 없었고 법정단체인 분회도 없었다.
사무실을 내기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퇴직 후 실컷 늦잠을 자기도 하고 이것저것 배우고 맛보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다가, 얼마 못 가서 무료함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조직에 속해 있다가 나오면서 느끼는 고독과 고립감, 그리고 무력감을 해소하는 데에는 활발한 사회활동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공식적인 네트워크가 있다면, 다른 이들도 서로 교류하고 경험을 나누며 다시 사회에 기여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지역 행정동우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동료 두 사람과 함께 광역지자체 행정동우회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자치구 단위 분회를 만들고 싶다고 하니, 필요한 서류와 참고자료를 건네주며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광역지자체에서는 기초지자체 전체에 분회를 설립하는 것을 당면과제로 추진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알아서 찾아가니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단체 설립에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10여 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고, 우리 사무실에서 첫 제안자 모임을 열어 미리 준비한 회칙 초안을 검토하고, 준비위원회 일정과 활동방법 그리고 발기인 20명 이상 모집방안 등에 대해 협의했다.
발기인을 모집하는 과정이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많았고, 받더라도 건성으로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다. 현직에 있을 때 친분이 두터웠던 동료 일부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30년 넘게 얼굴 봤으면 됐지, 퇴직하고도 또 봐야 합니까?"라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는 전화 응대조차 귀찮았던지 내 전화번호를 아예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
단체 참여를 꺼리는 이유는 많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퇴직 후에도 과거의 동료를 계속 만나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감을 느낀다거나,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원하기 때문에 단체 가입과 상충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뿐만 아니라 호칭 문제도 큰 걸림돌인 듯했다. 일부 동료들은 행정 조직에서의 직급 문화가 퇴직 후에도 여전히 작용하는 분위기에 불만을 드러냈다. 퇴직 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현직에 있을 때의 직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위원회에서는 단체 활동이 단순히 과거 동료들과의 교류가 아닌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본인의 경험을 통해 사회적 기여를 실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점을 강조하고, 호칭에 관해서는 공식적으로 동우회의 직책인 회장, 부회장, 이사 등을 사용하고 개인적인 친분 또는 나이나 경력에 따라 선배, 후배로 부르는 것으로 했다. 호칭 문제는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노력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인 것이 분명했다.
다행스럽게 흔쾌히 동참하겠다고 한 사람이 많았다. 준비위원장을 맡은 선배가 적극 참여하겠다는 사람들을 많이 찾아냈다. 위원장뿐만 아니라 준비위원 모두 열정적으로 나서서 애쓴 덕분에 제안자 모임이 있은 지 겨우 1개월 만에 40여 명의 발기인을 모집해 창립총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준비위원장 선배가 회장에 추대됐고 발기인 전체가 부회장 또는 감사, 이사로 선임됐다. 이어서 중앙회에 설립 신청서를 제출했고, 3개월 뒤 중앙회로부터 인증서를 받았다.
이후 법정단체 지원을 둘러싼 견해 차이로 오랜 줄다리기 끝에, 세무서에서 고유번호증을 발급받고 지자체로부터 행정재산 사용 허가를 얻었다. 1년 치 임대료를 미리 납부하고 공기 좋은 산자락에 위치한 구립 경로당 2층에 아담한 동우회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개소식을 열던 날, 우리는 퇴직 후에도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나는 퇴직 후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가족, 친구, 돈, 건강, 취미 등도 중요하지만, 같은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단체 활동 또한 큰 힘이 된다고 믿는다. 오랜 세월을 한 직장에서 함께 보낸 사람들과 나이 들어서도 어울리는 것은 결코 부끄럽거나 불필요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선배, 동료들과 함께 우리 지역의 행정동우회 설립에 기초를 닦고 힘을 보탠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고, 나는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