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지 못한다면 피해라, 월요일 수업
그 동안 기행글이랑 정보글만 쓰다 보니, 상당히 오랜만에 본인의 학교생활을 적는 기분이다. 이번 글은 교환학생인 투리가 겪었던 일상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니, 편하게 쓰도록 하겠다(사실 기행글이나 정보글은 여러 정보들을 찾아본 다음에 글을 써야 해서 한 편 한 편 쓰기가 힘들었던....).
폴란드 입국 이후 첫 여행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자정이 되어서야 도착한 투리. 하지만 이제는 학교 수업을 준비할 시간. 당시 투리는 모든 수업들을 끝까지 수강하기로 확정한 상태가 아니었는데, 그때 첫 번째 수업은 월요일 오전 8시에 있었다.
"아...내일도 일찍 일어나야겠네."
아무리 밤늦게까지 즐겁게 놀다 와도,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 수업을 듣는 것은 고된 일이다. 더군다나 이 수업. 처음 듣는 것도 아니고, 벌써 네 번째다. 아직 초반인데 벌써부터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이 느낌. 제아무리 "월요일 좋아"를 외치는 스펀지밥도 "이건 좀..."이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수업을 빠질 수는 없는 일. 다음 날 아침, 투리는 피곤한 얼굴로 세면을 마치고 교실로 향한다.
투리의 들었던 첫 번째 수업의 과목명은 "Animal Physiology and Nutrition (동물의 생리와 영양)".
생명과학에 덕후가 아닌 사람이라면, 참으로 재미없어 보이는 이름이다.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영문학 출신 또래한테 본인이 수강한 과목 명단을 보여줬는데, 하나같이 재미없게 생겼단다.
웃긴 건 투리가 수강한 과목 중에 "Animal Physiology (동물생리학)"도 있었는데, 저 'Nutrition' 과목의 제목명은 이 과목보다 더 긴 주제에 난이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쉽다. 나중에 이쪽 학과 학생한테 들은 말로는, 저 이름 긴 과목은 1학년들이 듣는 과목이란다. 반면 동물생리학 과목은 2학년들이 듣는데도 상당히 어려운 과목이고.
결국 최종 수강 과목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Animal Physiology and Nutrition"은 버리기로 했지만, 그 전까지 수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알려주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과학 실험이 동반되는 과목들은 과목당 이론수업과 실험수업이 각각 따로 진행된다. 바르샤바생명과학대학교(SGGW) 같은 경우는 실험수업이 이론수업보다 한 달 정도 늦게 개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과목은 이론수업과 실험수업이 2월 24일 동시에 개강이다.
이론 수업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수업이랑 크게 다를 게 없어서 소개할 건 없고(그래도 궁금하신 분들은 교환학생 1권 14화를 참조해주시길!), 실험수업 위주로 얘기를 해보자. 이 실험수업은 초등학교 시절의 컴퓨터실 같은 곳에서 수업이 열렸는데, 교수님이 대략적인 이론설명을 마치시면 사진 위의 학습지를 받는다. 그러면 근처에 있는 두세 명의 학생끼리 팀을 만들어서 저 학습지를 해결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그걸 적어서 저 팀의 임시 조장이 교수님께 내고 끝.
뭐 학습지를 해결한다고는 했지만, 명목상 실험 수업이니 직접 테스트는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교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위해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해오셨다. 예시를 몇 개 말해보자. 위 사진의 경우, 가장 첫 번째 문제 'Feeling of Touch'는 시선을 돌리고 팔이나 손바닥, 손등에 펜을 지속적으로 접촉하면 얼마나 맞추는지 확인하는 실험이다. 저런 실험은 펜만 있으면 되니 뭔가를 더 준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위 사진의 'Color Vision'과 'Blind Spot'은 얘기가 다르다. 전자의 경우, 실제 색맹 테스트 용지가 있어야 실험이 가능하고, 후자의 경우는 왼쪽 아래의 십자가와 점이 그려진 종이가 있어야 한다. 바로 저런 물건들을 교수님이 매 실험 때마다 가져온다. 그러면 우리는 그 준비물들을 가지고 학습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저 실험 결과들 중에 약간 인상적이었던 게 있다면, 자극을 손등에다가 주었을 때만 대상 학생이 실제 자극 횟수보다 2회 낮게 대답했던 거였다. 그 외 나머지는 딱히 흥미로운 게 없었다.
하루는 이런 수업도 했었다. 위 사진의 학습지는 3주차 수업에서 진행되었던 건데, 특정 상황에서의 심장 박동을 측정해 어떤 결과값을 도출해야 했다. 사진의 오른쪽을 보면 혈압 측정기가 보일 것이다. 먼저 저 혈압 측정기로 각각 가만히 있었을 때, 얼차려 20회 직후, 1분 동안 달리기를 하는 등 실험의 지시를 따른다. 그리고 그 직후의 혈압을 측정한다. 결과가 나오면 그중 수축기 혈압, 확장기 혈압, 측정 대상의 육체적 나이를 이용해서 주어진 식에 대입한다. 계산식은 사진에 나와 있는 학습지의 'Stroke Volume' 옆에 적혀 있는데, 격렬한 운동을 할수록 결과가 더 작게 나왔다. 이게 원래는 더 크게 나와야 하지 않나...?
물론 그렇다고 항상 컴퓨터실에서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실험만 진행되었던 건 아니고, 저렇게 이론 설명이 끝나면 실험실로 자리를 옮겨서 실험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의 사진이 바로 투리가 여행 다음 날 아침에 갔던 수업이다. 위 실험 내용은 혈액형 테스트. 고등학교 이과반 출신들 중에 바늘로 손 찔러서 피 낸 다음에 혈청 반응 확인하는 실험 해보신 분? 그게 바로 저 실험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지금 투리는 고등학교 때 해봤던 실험을 화석학번 대학생이 되어서 다시 하는 중이다.
아무튼 이런 실험을 반복하니, 어느 순간 갑자기 '현타'가 왔다. 대체 왜 본인은 폴란드에 와서 이런 실험을, 그것도 월요일 이른 아침에 하고 있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대학 새내기를 대상으로 한 수업이 어려워서는 안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런 수업은 누군가를 위해 분명히 필요한 수업이긴 하다. 그런데 투리는 저학년이 아니라, 이미 졸업해도 이상하지 않은 학번 학생이다. 아무리 영어 수업이라지만 저런 무의미한 수업을 투리는 왜 계속 들어야 하는가.
게다가 결정적인 문제는 저 수업이 월요일 아침에 진행된다는 점. 여행 기간을 하루라도 늘려야 하는 판국에, 월요일 아침 수업은 투리의 '주말을 낀 황금 같은 여행 기간'을 단축시켜버린다. 같은 기숙사의 나머지 두 명은 적은 대면수업으로 여유로운 반면 본인만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하니, 순식감에 피로감이 몰려온 것이다.
결국 저 혈액형 수업을 끝으로, 투리는 수업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솔직히 본인이 맘만 먹었다면, 저 과목을 끝까지 들었다면 투리가 통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수업의 가치가 투리의 3박 4일 여행권('금-토-일-월'까지 여행 가능)을 넘지는 못했고, 결국 해당 수업은 투리가 가장 먼저 포기하는 첫 번째 과목이 되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여러 장소들을 여행하고 돌아온 지금, 투리는 그 선택을 잘한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동의하는 말이다. 그런데 혹시 '어떤 명제가 성립하면, 그 명제의 대우도 성립한다.'라는 말을 아시는 분? 고등학교 수학 시간 때 배운 집합 공식이다. 이 공식을 지금 투리의 인생에 대입해볼까?
'즐길 수 없다면 피해라.'
이 말을 그대로 실행해서 만족한 흑투리! 비록 교환학생은 명목상 외국에서의 공부를 위한 제도라지만, 여행은 역시 많이 다녀오는 게 좋다! 이렇게 수학의 위대함을 한 차례 알리면서, 오늘의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번 글도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