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또 다른 시작
초가을 아침공기는 상쾌하다. 선선한 바람을 가르며 도시철도역을 향해 빠른 걸음을 걷는다. 몇 년 만인가, 퇴직하고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선 게, 까마득한 옛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한 달 AI 영상 과정에 선정되어 교육받으러 가는 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업이고 토, 일 주말은 쉰다.
범일역 8번 출구에 내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 옆 길거리 옷 가게도 옷을 전시할 옷걸이들을 펼치는 중이다. 녹색불이 들어오면 횡단보도를 건너 도매상가 옆길을 쭈욱 따라 걸어간다.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과일 노점상, 옛날 과자 노점상이 이미 전을 펼쳐 놓았고, 그 앞 건물 일층에 자리 잡은 양산, 우산 가게도 세팅을 끝내 놓았다. 몇 시에 나온 걸까, 부지런도 하셔라.
길을 따라 네온사인, 목장갑, 테이프, 비닐, 보석, 커피, 아주 조그만 밥집, 공인중개사 사무소 등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중간중간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너머로 신발, 옷, 가방 등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 옆모습이 보인다. 평화도매시장이다. 건물 안쪽은 들어가 보지 않았다. 요즈음 오프라인 매장들이 맥을 못 추는데 장사가 잘되는지 걱정되었다. 지금 내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긴 해도 남 걱정도 되었다. 도매상이라 괜찮은가 싶기도 했다.
줄지어 선 가게 앞을 지나다 보면 진열된 물건 위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는 사람, 상품들을 다 펼쳐 놓고 손님 맞을 채비를 끝낸 사람, 옆집 가게 주인과 잡담 중인 사람, 조그만 밥집에서 아침 먹고 나오는 사람 등등의 사람들과 스치며 지난다.
그들 중 첫날부터 눈길을 끈 사람이 있었다.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작은 길 가장자리에 서서 체조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키가 크고 빼빼 마른 60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 저분은 좀 특이하시네 '라고 생각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 사람은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서서 계속 체조를 하였다.
한날 아침,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먼저 웃으며 목례를 했다. '뭐지, 아는 사람도 아닌데, 나는 이 길을 비슷한 시간에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인데...
왜 인사를 하는 걸까, '
내가 청춘일 때 그랬으면 '뭐야, 나한테 지금 작업 거는 거야,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했을 터인데, 이제는 남자로, 여자로가 아닌 남자 사람 여자 사람으로 보이게 세월이 만들어 주었다.
다음날부터 서로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범일역 8번 출구가 아닌 10번 출구로 나오면 신호등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횡단보도는 녹색불은 짧고 빨간불은 많이 길었다. 대부분 빨간불일 때 그 앞에 당도하고 거기 서서 1분 이상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10분 출구로 가면 기다리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면 저분과 아침 인사를 나눌 일이 없게 된다. 나는 고민 아닌 고민거리가 생겼다.
말 한마디 건네보지 않았고 어떤 물건을 취급하는지도 몰랐다. 그 시간에 그 길에서 만나면 그냥 말없이 인사를 하는 사이였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 하나도 없지만 아는 척하는 관계가 된 것이다.
어차피 2주 후면 교육이 끝날 테고, 나는 아침 시간에 그곳을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내가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왜 그곳을 지나가는지 모른다. 오늘도 10번 출구로 가지 않고 다니던 8번 출구로 나와 같은 길을 걸으며 그와 마주쳤다.
그가 체조하는 곳, 앞의 가게에 여러 종류의 비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비닐 파시는가 보죠" "녜"라는 짧은 문답을 나누고 서로 웃으며, 목례하고 지나쳤다. 나는 그가 비닐 도매를 한다는 정보 하나를 얻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과 나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고 현생에서 다시 만났는데 서로 못 알아보는 관계 같았다. 그에 대한 느낌이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전생에서도 으러렁 대던 사이는 아닌 듯했다. 현생에서 만나기를 서로 원해서 만나기는 했는데, 좋은 느낌만 가졌지, 서로에 대해 아무런 기억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연이 아닐까,
교육 마칠 때가 다 되었는데 그에게 이제 이 앞을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그곳에 가면 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내가 아무 말 없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루 이틀 사흘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교육받으러 가는 길에 기분 좋은 아침을 선사해 준 그에게 작별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