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변하고 있다

불청객

by 등대지기

작은방에서 두 개의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주방과 화장실이 같이 붙어 있다. 벽면에 달려 있는 수도꼭지를 돌려보지만 한참 후 피식하는 소리와 녹이 쓴 물이 조금씩 나온다. 언제까지 녹이 쓴 이 물이 나올까 기다려 보면서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았다. 깨끗한 물로 씻고 싶었다. 사람 사는 집이 맞는지 활짝 핀 꽃처럼 쫙 벌어진 칫솔모가 젖어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아침을 깨우고 외출을 한 듯하다.

엄지손가락 가득 힘을 주어 겨우겨우 치약을 짜고 아무렇지 않게 양치를 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고, 설령 이 사람의 칫솔을 누가 썼는지 내가 없으면 그만이었다.

위에서 수없이 섞어 고여 있는 음식물들이 아래로 내려가기보다 차라리 위로 올라오는 게 편했는지 심하게 올라온다. 헝클어진 실타래 마냥 눈에 보이는 오염들이 녹이 쓴 물 위로 한바탕 전쟁 같은 소동을 피우는 사이 그나마 조금 투명한 물이 나왔다. 고양이 세수 마냥 대충 얼굴에 묻히고 금방이라도 뽑힐 듯한 머리카락들을 차분히 가라앉혔더니 이제야 똑바로 숨 쉬는 사람 꼴이 되어 보인다. 한심한 사람이 거울 앞에 서 있다.

"안돼~안돼~정신 차려 인마"

혼잣말로 중얼 그려본다. 커다란 대못에 걸려 있는 어제 입었던 운동복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얼룩진 티셔츠도 입어 보려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룩이 마치 유능한 화가의 그림 솜씨만큼 화려하다. 집을 나서면서 혹시나 또 와 볼까 하는 마음에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아니 또 올 것만 같았다. 꺼졌던 휴대폰을 켰더니 이 녀석도 하루 종일 깊은 잠에 빠진 듯 나를 찾고자 하는 연락 하나 없더니 잠시 후 모르는 번호로 "일어났을까"?

단답형 질문이 하나 온다. 집주인일까! 전화를 해 볼까 했지만 분명 나는 어젯밤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불청객이라 전화를 할 수 없었다. 누굴까 만약 집주인이 맞는다면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아니 술 취해 버려진 나를 분명 끌고 온 게 맞을 거다. 넥타이를 매고 따닥따닥 구두 소리를 내며 빠르게 걷고 있는 샐러리맨을 본다. 얼마나 바쁘길래 한 손에는 빵 한 조각 또 한쪽 손에는 250미리 우유 한 통을 들고 휴대폰에 의지한 채 고개를 숙이고 바쁘게 걷는 모습이 기저귀를 때고 마치 똥 마려운 아이처럼 보인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지만 운동복 바지 주머니 안에는 먼지조차 나오지 않았고 배고픔과 동시에 급하게 속이 쓰려온다. 걷는 게 어질어질하다 그렇다고 어딘지 모를 이 인파 속에서 내 집으로 가기보다 내 몸은 다시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시 오긴 왔네" 헛웃음이 나왔다.

내 집도 아닌 불청객이 집주인 몰래 여기에 서 있다는 현실에 혹시나 주거침입 죄로 신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주인이 오기 전에 뭐라도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싶었지만 사방을 두리번 그렸지만 조그마한 냉장고조차 없고, 겨우 하나 찾은 작은 냄비에는 언제 먹었는지 모를 불명의 형체로 나 좀 꺼내달라고 애원하는 거 같았다. 내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쌓이는 거 같다. 주방이라기보다 그냥 때 묻은 줄에 언제 씻어 말려 놓은 수건인지 행주인지 바싹 마른 동태 같았다. 나는 다시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받고 수건을 적셨다.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 물인지 모르지만 한 여름날의 돼 약 볕 온도 때문인지 따뜻했다.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둘러봤다. 환기가 잘되지 않는 서울의 어느 지하방, 곰팡이가 줄지어 소풍 가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어질러진 방, 먼지 쌓인 작은 테이블, 그리고 한 번도 세탁하지 않고 눅눅한 이불을 걷어 내었다. 이 수건으로는 때가 지워지지 않을 만큼 청소라는 자체와는 거리가 멀게 살아오셨던 분 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대충 눈에 보이는 곳의 먼지를 닦아내고 또 닦아내고 이불을 볕 좋은 곳에 늘었다. 녹이 쓴 채로 껍데기가 벗겨질 듯한 가스버너를 닦기 시작했다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한 발악인지 모른다. 그런데 힘들거나 기분 나쁜 기색이 없어 오히려 즐거웠다. 어젯밤 나를 재워 준 보답으로 하룻밤 신세를 갚는 데 있어 충분히 몸으로 때운 거 같았다. 잠시 후 다시 온 문자메시지 하나

"오늘 집에 못 가 하루 더 있어 줄래"

두 번째 온 문자 메시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다시 전해 온 문자

"방 안 선반 위 몇 만 원 있을 거야" 배고픔을 잠시 잊은 채 선반 위를 보니 정말 정리 정돈해 놓은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굴 위한 배려인가! 정말 누가 이렇게 나를 위해 챙기는 것일까! 일단 만 원짜리 한 장을 챙겼다. 왠지 부자가 된 기분이다.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 동네 골목을 지나 작은 슈퍼에 들렀다 나는 처음 보는 낯선 할아버지께 무척이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 동네에는 무슨 일이냐라는 뜻으로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라면 한 봉지와 설거지할 수세미 그리고 세탁할 수 있는 빨랫비누를 샀다. 이 집을 깨끗이 청소를 해 주고 싶었다.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