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평정심, 중도, 중용, 안정, 일희일비하지 않는 삶.
도연은 십구 년 전 싸이월드에서 스크랩해 온 이미지들을 상기해 본다.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 외국인 여성의 흑백처리된 사진을 떠올린다. 함께 게시된 글도. 반드시 그런 이미지 밑에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흔들림 없이 강해져야 하며 눈물을 흘려도 이내 스스로 닦아낼 줄 아는 강인한 여성이 되기 위한 충고의 글이 매치되어 있다. 그런 류의 글만 매일 같이 게시해 주는 이른바 싸이월드 감성글 전문 투멤 덕에 그 시절 도연의 감정들은 메마를 날이 없었다. 과잉이었을지언정 메마르지는 않으니 다행한 날이었다. 위로받고 공감했고 이 모든 일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안도감마저 느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방어기제'를 양껏 사용했다. 그런 글, 드라마 여주인공에 공감했고 열광했다. 관계 속에 살면서도 가장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럽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 처럼. 두 번 다시 그 슬픔을 겪고 싶지 않으니 아예 처음부터 감정이 없던 사람처럼 철저히 스스로를 엄호하려 드는 모양새다. 하지만 인간의 관성, 습성, 습관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이내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자신을 격멸하고 실망감에 허우적거리는 날들이 많았다. 차라리 끝모르게 슬퍼하고 감정에 충실했던 과거가 나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많이 아팠지만 차라리 그때가 지금보다 나았던 시절로 기억하면서. 지금은 그럴 수 없기에 더욱 외롭고 슬프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후 우리 사회는 '마음(건강)'에 귀를 기울이는 유행, 문화이자 사회로 변화해 왔다. 도리어 과한 '마음 읽기'의 또 다른 부작용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도연의 마음은 그곳까지 다다르진 못했으니 그 이야긴 차치하고서라도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는 유난한 일이 아니라니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읽고 보는 것 말고도 매주 일요일이 되면 집처럼 드나들던 절의 청년부 법회 법사스님에게도 꽤 자주 듣고 보던 단어들이다.
주로 '방하착, 중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등명 법등명' 등' '자신' 또는 자신의 마음이 우선시 되어야만 가능한 마음의 현상, 가치들을 기조로 한다. 어쩐지 평온하고 잔잔하며 무언가를 치열하게 쟁취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의 단어인 것 같다. 어디에 쉬이 휩쓸리거나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한 사람들을 보면 그리 말해주면 될 것 같은 이미지를 준다. 그 이전의 싸이월드와 방어기제의 혼용의 시대만 해도 종교적 심신이 깊은 사람들이 관심 갖는 다소 무게감 있는 단어들이었는데 웰빙, 이너뷰티, 마음건강 등 사람의 삶의 안정을 필두로 하는 지금의 삶에선 훨씬 더 각광받는 가치가 되었다.
하지만 도연은 생각한다. 유난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오히려 중도니 안정이니 하는 정의적 문화때문에 도리어 집착이 생겨 생각지 못하게 더욱 마음이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말이다. 무언가를 단정하고 정의하는 순간 머릿속엔 그러한 상이 생긴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말라 배우지만 누구보다 시시비비를 가리게 된다. 물론 불교적, 종교적, 가치적, 심적 의미를 온전히 본연의 뜻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긴 부작용들이다. 불교에서는 무엇을 '해내라' 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것 안 하면 죽는다, 큰일 난다'와 같은 어조가 없다. 그래서 생기는 장점은 선택은 본인에게 있다는 것이고 단점 역시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는 것이다.도연은 자신의 무지에서 온 그 '부작용'에서 허덕이고 있는 끝 모를 세월들이 지난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도연은 매 순간 떠올렸다. 그리고 바랐다. 찰나의 안정과 안도의 순간을 맞으면 좀 더 그 시간이 길어졌으면 했다. 너무 짧아 만끽 할수도 없었다. 멈추게 할 도리도 없었다. 그렇게 좀 더 길어지고 나면 오늘 하루는 줄곧 안정이 함께 했으면 했다. 이제는 며칠만 더 지속되길 바랐다. 그렇게 단 몇 주만이라도, 몇 달 만이라도 오래오래 갔으면 했다. 허나 그럴 수 없음을 아는데 채 3초가 걸리지 않는다. 바라고 또 바라고 계속 바라느라 '마음'은 없고 '바람'만 있다.
듣고 배운 것만큼 커지지 못하고 어쩐지 더 좁아지는 마음줄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흔들리는 바람도 용납할 수 없고 머리칼보다 가느다란 무언가로 자신을 건드는 것조차 도연에겐 곤두서는 자극이자 스트레스며 바위보다 단단하고 커다란 장애가 된다. 마치 무균실에 있어야 할 사람처럼 외부로부터 어떠한 침입도 마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불행하다. 부귀영화를 바란것도 아닌데 꿈도 아닌 그저 평온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이 바람을 이루기 위해 늘 바람 앞 촛불처럼 노심초사해야 하다니 아이러니다.
서른 아홉 해동안 스스로 유난한 일들을 벌이기도 했고 당했고 겪었다. 도연의 삶은 늘 그랬고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도연에게는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 몰랐는데'와 같은 후회는 매우 흔하다. 조금 다른의미로 늘 놀라움의 연속이다. 참으로 유난하다 생각하며 산다. 그 삶이 유난한 건지 도연의 마음 자리가 유난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