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 골목에서

"기쁨은 늘 덧없고 슬픔은 지나고 나서야 성장으로 남지요"

by 양연화


‘결국, 기어코, 마침내, 드디어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더랍니다’라고 미소 지으며 혹은 살짝 감동의 눈물을 머금은 채 마칠 수 있는 희극적인 이야기. 사람들의 끝이 모두 희극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랍니다’는 그 사람 입에 붙은 말투였다. 다른 이가 했더라면 조롱으로 들렸을 그 말투는 그녀의 입을 통하니 나의 모국어에 이국적인 정취를 묻혔다.


그녀는 마치 자기 삶이 하나의 완성된 문장이라도 되는 듯 조용히 그 중심에 있었다. 중심이라 했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주인공으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자족하는 방식의 중심이었다. 누가 그녀를 무시하든 특별히 띄워주든 그녀는 그에 따라 무너지거나 부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자존감이란 단어를 체현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자존감을 스스로 일으키려 애쓰고 종종 타인의 시선으로 그것을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자존감을 가지려 하지 않았고 애초에 무너지지 않는 자아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가 철학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고의 깊이는 그녀가 말을 하지 않을 때조차 공간을 감쌌고 그녀가 한 문장을 꺼내 들면 그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숙고 끝에 건져 올린 무엇처럼 묵직했다.


그녀는 자기를 사랑했다. 거울 앞에서 예쁘게 보이려는 사랑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자리를 내주고 이해하려는 방식으로. 내게는 그게 굉장히 이국적인 태도로 느껴졌다. 마치 자기 자신을 타인처럼 조용히 관찰하고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자주 혼자였고 그 고요 속에서 불편함이 아니라 평안을 찾았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창문에 기대 커피를 마실 때 그녀는 아무것도 과장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늘 생각했다. 저 사람은 세상에 기대지 않고도 세상을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행복하세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녀는 잠시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저기 어딘가 도달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그냥 저로 사는 중이에요.”

나는 이해했다. 그녀는 완성된 사람이었다. 어딘가로 도달해야 할 필요 없이 이미 자신으로서 충분한.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모든 사람을 부러워했던 사람이다. 누군가는 늘 무심하게 멋졌고 누군가는 웃기만 해도 사랑받았으며 누군가는 말 한마디에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부러움의 요건도 모두 타인의 시선으로 비롯된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은 항상 남들보다 한 발 늦은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정작 누구보다 노력했음에도 그녀는 중심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를 좋아하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만큼 불가능해 보였다.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감각은 뿌리 깊은 수치심처럼 그녀 안에 자라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운 어머니의 얼굴은 젊을 때보다도 더 따뜻해 보였다. 죽음을 앞둔 자의 얼굴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웠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마디가 얇고 주름진 손. 어릴 적 발을 헛디뎠을 때 그 손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잡아주곤 했다. 숨이 가빠지던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너는 사랑받을 만한 아이야. 내가 너를 사랑했으니 그건 증명이 되겠지. 세상에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한 거야."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감히 자신이 가질 수 없다고 여긴 ‘가치’를 품은 말이었다. 어머니가 죽기 직전 남긴 이 유언은 단 한 문장으로 그녀의 오랜 부정과 자책을 정면에서 뒤집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기억들을 따라갔다. 어린 시절 그녀의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며 "정말 독특하구나"라고 말하던 어머니의 목소리. 시험에 떨어진 날에도 "괜찮아. 너는 또다시 해낼 아이니까"라고 말하던 따뜻한 눈. 감기에 걸린 밤, 밤새 걱정 가득한 눈으로 간병해 주던 그 손. 그 모든 사소한 일들이 사랑의 역사였다.


그녀 자신은 그저 '노력으로' 자존감을 갖고자 했지만, 사실은 이미 '받아온 사랑' 안에서 태어나 자라온 존재를 피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 준 이의 눈으로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일이라는 걸 그날 깨달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아래에는 그녀가 나에게 해준 삶의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여러분들도 같이 읽어보길 바란다.



16771174702_8cbbdd1b67_b.jpg 출처: flickr



"인생을 관통하는 여러 단어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모순’이랍니다. 모순을 통해 인간을 조명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한강 작가님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을 선택한 여주인공 영혜는 비폭력과 순수함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모순적으로도 그 선택이 가족과 사회의 강압적 폭력과 충돌하며 자기 파괴로 내몰았답니다. 박경리 작가님의 소설 토지는 식량난으로 굶어 죽은 어린아이들과 그 무덤, 그리고 한바탕 소란스러운 풍년제를 동시에 그립니다. 소설에서는 그 아이들을 애도하면서도 풍년을 기뻐하는 모순을 안고 마을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시작된답니다.


우리는 삶은 짧다고 느끼며 다가올 죽음에 두려운 반면에 어떤 하루는 길고 지루하게 느끼기도 하지요? 또한 사랑하고 더 가까이하고 싶은 이에게 받은 상처를 가장 먼 이에게 위로받기도 합니다. 삶에서 기쁜 순간들은 지나가고 나면 쓸쓸하지만 슬픈 순간들은 지나가고 나면 성장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슬픔보다는 기쁨을 원하지요. 결국 모순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사실 여기에서 해결책은 없답니다. 다만 수용이 있을 뿐이랍니다. 기쁨은 늘 덧없고 슬픔은 지나고 나서야 성장으로 남지요. 그러니 기쁨에 인색할 필요도 슬픔을 밀어낼 이유도 없답니다. 우리는 그 모순을 껴안은 채 살아가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순간을 지나며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때로는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것이랍니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자유’를 통해 인간 생활을 조명할 수 있답니다. 역사 속에서 서민층은 자유와 투쟁했어요. 정치적 자유를 외치며 권리를 찾기를 바랐습니다. 경제적 자유를 외치며 배고픔으로부터의 해방, 노동의 강요로부터의 해방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자유가 쟁취된 후에는 곧 또 다른 책임과 불안이 파생되었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선고받았기에 그저 삶 자체에서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했답니다. 우리는 결국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걸까요?


시지프스 신화에서 시지프는 신들을 속인 벌로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고 꼭대기에 도달하면 다시 굴러 떨어지고 이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형벌을 받았답니다. 이는 우리 삶을 조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우리는 매일 비슷한 주기로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매일 비슷한 일을 하며, 매일 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무료하기 짝이 없지요.

알베르 카뮈는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자유의 해답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런 무료함을 인식하고 마음속 깊숙이 받아들이고 이 안에서 일종의 반항을 하며 행복을 찾으라는 것이 해답이랍니다. 시지프스로 친다면 돌을 뒤로도 굴려보고, 한 손으로도 굴려보고, 물구나무서서도 굴려보고, 노래하면서도 굴려보고, 지그재그로도 굴려보며 행복을 찾아보라는 것이죠. 우리로 친다면 여행을 가고,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길거리에서 노래도 불러보고, 춤도 추고(남들에게 피해 끼치지 않게 우리끼리 있을 때만 그러는 걸로 해요) 하며 행복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어때요? 이제는 모두 자유롭답니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