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몸으로 버텨낸 너, 그리고 이별
4일 새벽 1시.
전화가 울렸다.
“아이가 많이 아픕니다.”
나는 NICU 웹캠을 켰다.
너는 자꾸만 놀라고 있었다.
그건 반사가 아니라,
‘발작’이었다.
전원, 그러나 너무 늦었다
5일 이른 오전,
의사는 말했다.
“세균성 감염 양성 반응이 나왔습니다.
상급 병원으로 전원 조치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인큐베이터 안 너는 계속 발작 증세를 보였고,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구급차가 도착했다.
너를 옮기기 전, 상태를 안정화해야 한다며
의료진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너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구급차에 실리는 순간까지
간절한 기도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살게 해주세요. 제발…”
레벨 1 병원에서의 사투
우리는 레벨 1 소아외상센터가 있는
상급 병원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의료진이 달라붙어
검사와 약물 투여가 이어졌다.
아이에 대한 진단과 긴급 조치를 취한뒤,
의사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셨나요?”
그 순간엔,
뇌사 상태든, 어떤 장애든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살아만 준다면.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말 속엔 이미 결말에 대한 암시가 숨어 있었다.
작은 몸에 이어지는 고통
너의 작은 몸에 주사 바늘이 하나둘 더해졌다.
심박수는 돌아왔지만, 혈압은 돌아오지 않았다.
강도 높은 약물과 수액으로
작은 배는 점점 부풀어 올랐고,
소화 기능도 멈춰버렸다.
6일 밤,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준비해야 했다.
너는 형, 할아버지, 친척 이모까지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하듯 만나고,
7일째 저녁,
작은 눈을 감았다.
이별 후에도 이어지는 절차
이성을 잃는다는 게 이런 걸까.
남편과 나는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만큼 무너졌다.
하지만 아이가 6일 동안 ‘살아 있었기에’
출생신고, 사망신고, 장례까지
모든 절차를 직접 밟아야 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아이를 보내야 했고,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책과 후회의 나날들
타지라서 더 힘들었던 걸까.
한국이었다면 달랐을까.
의료진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고위험 산모 전문의를 찾지 않았던 내 탓일까.
수없이 자책하고 후회하고,
원망과 분노가 뒤섞인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첫째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 덕분에
다시 일어나야 했고,
다시 사회로 나와야만 했다.
미국에서
자녀 출생신고는 종종 하지만,
사망신고, 화장, 납골당 안치까지 겪는 가족은
아마 드물 것이다.
너는 태어날 때
한쪽 눈을 떴고,
손가락, 발가락도 온전히 갖췄고,
참 튼튼해 보였다.
그런 너를 보내고 난 지금,
우리 마음은 아직도 건드리면
툭 하고 터질 듯 아프다.
하지만 우린 안다.
너를 품었던 시간, 우리가 견뎌낸 사랑,
그 모든 기억은 영원히 마음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