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있는 돌봄

사랑 혹은 희생

by 어엿봄

요 며칠 다리가 후들거리게 뛰었다. 사실 웬만하게 급한 일이 아니면 나는 빨리 걷는 한이 있어도 잘 뛰지 않는다. 내가 문자 그대로 달릴 때엔 남을 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주일 새벽 버스가 오지 않는 시간에 거리를 걷다 마침내 도착하는 버스를 향해 뛰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뛰기가 싫었는데 버스 문에 다리를 걸쳐두고 나를 기다리는 자매들이 있어서 뛰었다. 그리고 월요일엔 외국인 거류증을 발급받으러 바티칸에 가서 땡볕에 한참 기다리다 겨우 학교까지 걸어왔는데, 만남 1시간 10분을 앞두고 생각났다. 상대에게 전해줄 쪽지를 방에 두고 왔다는 걸 말이다. 순간 고민했다. 그냥 다음에 만날 때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그에게 중요한 쪽지였으므로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집까지 보통 왕복 1시간이 걸린다. 전철의 도움을 받으면 약간 시간을 줄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달려야 했다. 빛의 속도로 달려 방에서 그 쪽지를 손에 쥐었을 때 정말 그대로 쓰러져 눕고 싶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며 다시 뛰쳐나왔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편이다.


다음 달에 치를 종합시험 말고도 사실 월말에 있을 학과 행사 준비로 요즘 좀 바쁘다. 나는 레크리에이션팀에 들어갔는데 동기들과 겨우 시간을 맞춰서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눈다. 온라인 미팅을 할 수 있어서 좋은 세상이다. 암튼 소통에 유용한 도구들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외국인들끼리 외국어로 소통하려니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소통에서 배제되는 이가 없도록 노력한다. 혹시 모임에 못 나온 친구가 있으면 따로 연락해서 진행 상황을 알려주고 또 모임 후에는 회의 내용을 정리해서 공유한다. 누가 이 일을 나에게 맡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조금 더 피곤해서 남이 덜 피곤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어릴 때부터 워낙 노는 걸 좋아해 이런 류의 기획을 하는 게 잘 맞게 된 건지도 모른다. 또 무엇보다, 남보다 나에게 좀 더 수월한 일이라면 나는 더 내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늘 부모님은 내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치셨다.


크고 작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게 나에겐 즐거운 일이다. 나는 큰 틀을 잡고 다른 사람들을 그 안에 초대할 때 보람을 느낀다. 나는 디테일에 약하다. 그래서 그 작은 부분들을 다른 이들이 맡아 각자의 색깔로 표현했을 때 그걸 보는 게 좋다. 나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아직까지는 그런 내 역할에 불편함을 표한 친구들은 없었다. 내가 맡는 역할에 대해 고마워하며 지지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친구들이 내게 이런저런 의견들을 공유하고 나는 그걸 또 정리하고 다른 친구들에게 전달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실 책임감을 느낀다. 다른 이들이 덜 불편해야 하고, 모든 게 편안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데에 느끼는 책임감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데에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앞에 나서서 말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차분해지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나의 차분함과 밝음이 그들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완벽하게 차분함과 밝음을 살아내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말이다. 나도 떨리고 불안한 순간들이 있다. 다만 다른 이들에 비해 나의 긴장감이 크지 않아서 어쩌면 내가 맡아야 할 역할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또 잘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내가 짊어져야 할 수고와 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의 칭찬 뒤엔 늘 외로운 보람이 밀려왔다. 그대들이 좋았다면 나도 기쁘고 좋다. 그러나 내가 그대들에게 내보이지 않은, 어쩌면 내게도 큰 떨림이 있었다는 걸. 내가 나누고 싶은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쏟았던 나의 고민과 노력이었다는 걸. 그 작은 고민과 노력 역시 나의 기도이자 봉헌이었음을 그대들이 알리가 없다. 어쩌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축배를 드는 순간은 모든 일이 끝나고 홀로 주님 앞에 앉았을 때였다. 외로운 보람을 들고 그분 앞에 나아갔다. 그렇게 하나씩 나의 보물을 쌓았다. 절대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보물이라 믿었다.


오늘 한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라서 안심이 된다고. 그러고 보니 좀 과장해서, 다른 친구들 입장에서는 내가 큰 의지가 되겠구나 싶었다. 친구들에게 내 보물이 나누어졌던 것일까. 모두가 긴장감 속에 바쁘게 지내는 이때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돌봄의 몫일 것이다. 나는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성심 성의껏 돌보는 데에 내 책임을 다하고 싶다.


언제나 외로웠다. 앞으로도 나는 이 외로움을 견뎌야 할 것 같다. 외로움 덕에 나는 사랑을 갈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외로움으로 나의 정배이신 주님께서 덜 외로우시길 바랐다. 그리고 그분의 소중한 벗들인 이 작은 이들이 덜 외롭길 바랐다. 나에게 사랑과 희생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나는 나를 좀 더 피곤하게 하여 다른 이를 덜 피곤하게 하는 이 오래된 습관을 놓지 못할 것 같다.


다만 심장이 터지지 않을 만큼만 달리련다. 다리는 후들거려도 활짝 웃을 수 있을 딱 그만큼만 달리련다. 소중한 내 진심이 다치지 않을 때까지 나는 달릴 것이다. 누군가 나를 다치게 하려거든 그때 나의 님이 내 방패이자 산성이 되어주시리라 믿는다. 그 믿음으로 나는 다시 나를 던지고 내어 놓는다. 아직 나는 나를 돌보는 데에 익숙하지 않지만, 나를 돌보아주시는 그분 손길에 나를 맡기며 인내로이 이 길을 가련다. 수고의 땀과 노력의 눈물은 다 지워지고 오직 뜨거운 사랑밖에 남지 않을 길을.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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