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기쁨

인적이 드문 길

by 어엿봄

아침 등교 길에 살짝 길을 꺾었다. 가보지 않은 길이다. 로마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 있다니 기분이 참 좋았다. 초록빛을 따라 내 안으로 번지는 아침 공기의 상쾌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활짝 웃었다. 나는 이 길에 나의 이름을 붙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작은 기쁨을 준다.


긴 하루였다. 빼곡히 오전 시간을 보낸 후 늦은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나름 여유 있게 오후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지막으로는 고해성사를 보았다. 그런데 아뿔싸! 보속이 뭐였는지 기억이 정확히 안 난다.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 같다. 어느 순간 팍 하고 떠오르길 바라며 잠시 미뤄둬야겠다. 이런 나의 모자람에 조금은 여유로워질 수 있는 5월이다. 5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하지만 올해 로마의 5월은 쨍한 햇볕과 거센 바람이 공존해서 우리에게 당혹감을 준다. 일교차와 동시간대여도 해가 드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기온차가 심해서 적응하기가 아직 힘들다. 차가운 손을 비비다 갑자기 뜨거워지는 등에 겉옷을 벗는다. 나는 이 뜨거움과 공존하는 차가움이 힘들다. 혼란스러움은 내 모자람을 더 키우지만 그럼에도 5월은 나름의 멋이 있으므로 잠시 참아보기로 한다. 그 인내로써, 여름에 태어난 나는 아직 나의 계절을 기다리는 중이다. 매번 존재만큼의 땀을 흘린 후에 여름과 작별인사 할 때면 내 키가 한 뼘은 자란 느낌이 들었다. 치열하게 산 만큼 성장하는 시기가 바로 나의 계절, 여름이었다.


사실 어린 시절 나의 여름은 즐거운 놀이로 가득 찬 때였다. 치열한 노력의 결과인 생존이 아니라 열렬히 놀아서 그 끝에 즐거움을 얻는 계절이었다. 단연 놀이의 꽃은 여름 신앙학교였다. 밖에서 너무 뛰어놀아 심하게 타는 바람에 피부가 벗겨지고 아팠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신나고 즐거운 나의 계절이 지나가는 게 늘 아쉬울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사계절 내내 즐거운 인생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 아니어도 웃을 수 있도록, 나만의 기쁨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작은 기쁨은 찰나의 계절에 찾아왔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볼 때 괜히 내 겨드랑이가 간지러워 웃는다. 지나가는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쳐 찡긋할 때 활짝 웃는다. 하늘의 뭉게구름이 왈츠를 출 때 몸이 움찔거려 웃는다. 부지런히 걷다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우스워 킬킬거리며 웃는다. 모든 게 나의 달콤한 간식과도 같은 기쁨의 소재들이다. 그런데 막상 어느 순간부터 여름이 되면 이 기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작음에 내어줄 마음의 한 점이 모자랐다.


무더운 여름의 땀은 치열한 나의 삶을 증거 했다. 잠시 기쁨을 찾던 일을 멈추고 나는 치열하게 더위와 맞서 싸웠다. 내 마음은 꼭 뜨거운 용광로와 같아서 그 모든 걸 다 녹여 내렸다. 그렇게 모든 걸 다 녹여 내리며 나는 나의 계절을 살았다. 마치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인양 그렇게 그 시간을 견뎌냈다. 여름이 지나갔을 때 나는 성장을 했다. 힘들었지만 나는 흘린 땀만큼 맑아진 얼굴을 하고 빛났으니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꼭 이런 여름이 아니어도 괜찮다.


나의 계절이 다시 온다. 나를 낳은 그 계절이 나를 살게 할 것이다. 나를 빛나게 할 것이다. 어쩌면 숨찬 달리기를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저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 온 작은 기쁨들을 꺼내보고 실컷 웃기만 하면 될지도 모른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누워서 낮잠을 자다 일어나 달달한 수박을 베어 먹으며 뚝뚝 흘린 분홍색 자국을 팔로 쓱 문지르고 책장을 넘길 것이다. 나의 소중한 이야기가 담긴 계절의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나는 한참을 웃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가 오늘 찾은 아침의 인적 드문 길을 두고 또다시 웃고 웃으며 이 하루의 기쁨을 되새길 것이다.


역사의 대서사에는 남기지 못할지언정 내 인생의 값진 한 꼭지 정도는 될 수 있으리니, 그저 모든 게 반갑고 기쁘다. 사랑하는 나의 계절이 온다. 내가 성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있는 나로 살 수 있어 아름다운 때다. 그 계절에 나는 살리라. 내 이름만큼 나를 규정하는 그 기쁨으로 가득 차 살리라.

keyword
이전 15화빛깔을 택할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