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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보수당은 이제 망할까 : 트럼프 효과의 위력

호주 노동당의 연방 선거 압승 원인

by 삼중전공생

현재 상황


2025년 5월 3일, 호주 연방 선거가 있었습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호주는 150석의 하원과 76석의 상원으로 구성되며, 하원이 법안을 발의하고 예산안을 심사하는 핵심 기구인 반면 상원은 법안 발의와 예산안 심의는 할 수 없고 단순 승인 또는 부결만 가능한 구조입니다. 노동당(Labor Party, ALP)은 하원에서 기존에 77석으로 간신히 과반인 76석을 넘겨 정권을 잡고 있다가 이번 선거에서 대승을 거둬 현재까지 85석의 의석을 얻은 상태입니다.


하원은 단순다수 선호투표제(IRV), 상원은 단기이양식 비례대표제(STV)를 채택하면서 전 국민이 의무 투표를 하는 국가인 호주 특성상 개표까지 며칠에서 몇 주가 소요되기 때문에 지금도 확정된 의석이 아니며, 현재 16석이 결과를 기다리는 상태이기에 추세에 따라 노동당이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Australian Federal Election 2025 Live Results | ABC]


이에 따라 노동당이 정권을 하원 임기만큼인 3년 더 연장하게 되었고 앨버니지(Anthony Albanese) 총리 또한 재집권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2004년 존 하워드 정부 이후 21년 만에 현직 총리가 선거를 통해 의석을 늘리는 성과를 거둔 것일 만큼 이례적인 경우입니다.


한편 제1야당인 자유-국민연합(Liberal–National Coalition, L/NP)은 직전 2022년 선거에서 58석이었던 의석이 40석 남짓으로 급감하며 역사적 참패를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대패의 원인은 전통적인 보수당 강세 지역이던 수도권 부유층 지역을 자유당과 녹색당을 섞은 온건 중도 성향의 "Teal" 그룹의 무소속 후보들에게 빼앗긴 탓이 큽니다. 이로 인해 도시 지역에서 당선되었던 자유-국민연합의 온건 중도 성향 후보들이 대거 낙선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원은 노동당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상원은 비교적 다당제 구도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상원 여섯 개 주에 6석씩 할당된 것에 두 개의 준주에 2석씩 할당한 것을 더해 총 76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주에 할당된 의석 중 절반과 준주의 의석인 총 40석에 대한 선거가 치러진 결과, 노동당은 28석을 확보하여 전보다 2석을 늘리는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현재까지 상원 개표는 36.9% 진행되었는데, 지금까지는 노동당이 상원 과반인 36석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상황입니다.




보수 야당 대패의 원인, "트럼프 효과"


노동당의 압승과 보수 야당 대패의 원인으로 언론이 지목하고 있는 것은 소위 "트럼프 효과"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호주 유권자들의 심리에 영향을 미쳐 선거 결과를 좌우했다는 것인데, 이미 캐나다에서 2025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우세하던 보수당이 트럼프 취임 후 민심이 돌아서서 패배하고 중도좌파 마크 카니가 총리에 오르는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호주도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에는 노동당과 자유-국민연합의 지지율이 경합을 벌이던 국면이었습니다.


화면 캡처 2025-05-06 092314.png 출처 : 2025 Australian federal election | WIKIPEDIA


이는 전 세계적으로 트럼프의 급진적·논쟁적 정책과 권위주의적 행태에 대한 거부감이 퍼지면서 호주 유권자들도 이에 영향을 받아 트럼프와 보조를 맞추는 듯한 호주 보수 세력에 등을 돌렸다는 분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호주 야당인 자유-국민 연합은 실제 선거운동 과정에서 트럼프에 밀접하게 연관된 이슈와 전략을 전면에 내세워, 결과적으로 이러한 '트럼프 효과'의 직격탄을 맞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가령 피터 더튼(Peter Dutton) 자유당 당수는 선거 전부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치켜세우곤 했습니다. 더튼은 트럼프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주민 이주 계획을 주장하자 그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a big thinker)", "영리한 사람(shrewd)", "협상가(a deal maker)" 등으로 표현해 줬습니다.2023년 말 실시된 호주의 의회와 내각에 대한 원주민의 목소리를 담는 헌법 기관인 보이스(The Voice)를 신설하는 국민 투표에서, 더튼은 호주 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용지 표기 규정에 의혹을 제기하며 결과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캠페인을 벌였는데 이는 중도층에게 트럼프식의 선거 불복을 연상시키는 행동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야당이 분노와 분열을 선동하는 미국의 트럼프식 정치에 기대어 문화전쟁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호주 국민의 정서에는 맞지 않았던 셈입니다. 한편 "트럼프 효과"는 국제 외교 환경의 급변으로 인해 야당의 경제·안보 공세가 무력화시키는 측면도 낳았습니다. 2025년 4월 들어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전쟁을 시작하며 동맹을 경시하는 발언을 하자 호주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세계 경제 혼란과 안보 불안에 대한 우려가 커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정적인 외교·경제 관리 능력을 어필한 여당에 비해 트럼프와 보조를 맞추는 야당이 인기를 얻기는 어려웠습니다.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는 야당이 트럼프의 정책을 모방하려 했던 것도 있습니다. 야당은 "정부 지출 삭감 및 관료주의 타파"를 명목으로 연방 공무원 수를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DOGE'를 연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공무원의 재택근무를 금지하고 출근을 강제하겠다는 공약은 마찬가지로 트럼프의 정책을 따라한 것이었지만 코로나 이후 유연 근무에 익숙해진 유권자들의 큰 반발을 샀습니다.


또 석탄 산업 옹호 및 원자력 발전 도입을 주장하고, 호주 원주민의 토지와 문화를 존중하는 행사인 "Welcome to Country"를 'Woke 이념'이라고 비난하는 등 야당은 선거 기간 내내 문화전쟁적 이슈에 전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은 다수 유권자들의 관심사와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노동당 정부는 유아 돌봄비 및 약값 인하, 의료 서비스 확충 등 생활밀착형 공약을 앞세워 중도층과 젊은 층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호주 보수 정당의 미래


호주 보수 정당은 2000년대 후반 이후로 온건 중도 성향의 '소문자 L 자유주의(small-l liberal)' 진영과 강경 우파 진영 사이의 이념 갈등이 심화되어 계파 갈등과 리더십 교체를 반복하며 일관된 정책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중도층 유권자들에게 정당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켰고, 2019년과 2022년 선거에서 그 조짐이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2022년 선거는 이런 추세의 분수령으로 보수 연합은 수도권 부유층 도시 지역 의석 다수를 무소속 온건 진보 성향 후보들에게 잃는 "틸 물결(Teal wave)" 현상을 겪었습니다. 기후변화에 미온적이고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모리슨 정부에 반발한 중도 우파 성향 유권자들이 자유당 후보 대신 친환경·반부패 가치를 주장하는 무소속 후보(틸 후보)들을 대거 당선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자유당 강세였던 시드니·멜버른 핵심 부촌 지역구들이 무소속 후보에게 넘어갔고, 자유당 온건파 인사들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2022년 선거 패배 이후 당권을 잡은 피터 더튼은 당의 노선을 재정비하기보다는 당내 강경 우파 노선을 더욱 강화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러면서 '보이스(The Voice)' 국민투표에 반대하며 문화전쟁적 담론을 주도하고, 석탄 산업 옹호와 이민자 범죄 문제 부각 등 보수 지지층 결집 전략에 주력했습니다. 이는 농촌 및 일부 교외 보수층에게는 소구력이 있었지만, 이미 자유당을 이탈한 도시 중도층의 지지를 받기에 적절한 전략은 아니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강경 우파 노선의 강조는 더튼 체제 하에서 줄리 비숍이나 말콤 턴불 등 자유당의 중도 개혁파 인사들이 정계를 떠나거나 주변부로 밀려나게 만들었고, 당내 이념 균형이 더욱 극우 쪽으로 치달으며 유권자 기반이 좁아지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2025년 선거의 역사적 참패는 호주 보수 정당이 근본적인 기로에 섰음을 보여줍니다. 가디언지는 자유당이 '창당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론조사를 보면 40세 이하 유권자 층에서는 노동당과 녹색당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고, 자유당은 농촌 지역과 고령층 위주의 정당으로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가 고착된다면 보수 야당은 앞으로 대규모 재편(realignment) 없이는 집권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따라서 재창당 수준의 혁신으로 기존 노선과 인물을 과감히 정리하고 새로운 중도 보수 정당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다수 평론가들의 지적입니다.




결론 : 호주 보수 정당의 참패가 한국에 주는 교훈


보수 정당의 실책이 도시 지역에서의 의석 상실을 만들고, 그럼으로써 도시 지역 기반의 상대적으로 온건 자유주의 보수 정치인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당내에 강경 우파를 견제할 세력이 힘을 잃자 정당은 더욱 우경화되는 메커니즘은 결과적으로 호주 보수 정당을 연이은 대패로 몰고 가 결국 정당의 정치적 생명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비단 호주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박근혜 정부가 처참하게 탄핵당한 이후로 한국에서도 보수 정당이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지율은 민주당과 엎치락뒤치락했지만 자유한국당 이래로 소위 아스팔트 우파, 극우 개신교계, 부정선거론 등에 휘둘리고 경도되면서 중도층에서의 지지는 일관되게 상실해오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승민을 위시한 보수 정당 내 혁신파 인사들이 입지를 상실하거나 정계를 떠나는 일이 발생해 왔습니다. 전반적인 구도는 호주와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 호주 보수 정당의 대패는 한국 보수 정당에게도 불안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TK + PK + 강원도를 모두 합해도 지역구 의석이 73석 밖에 되지 않습니다. 향후 개혁신당에게 비례대표 의석수를 빼앗길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개헌저지선인 100석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석 내외를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에서 확보해야 하는데 당장 2024년 총선만 해도 서울 + 경기에서 17석을 얻는데 그쳤습니다. 마치 2022년 호주 총선 당시의 분수령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만일 2028년 총선에서도 보수 정당이 대패한다면, 심지어 단독으로 100석을 넘기지 못해 개헌저지선을 확실히 확보할 수 없다면 사실상 '영남 자민련'으로서 몰락이 확정적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미래가 실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한국 보수 정당은 재창당 수준의 혁신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아 올 수 있었던 해외의 다른 정당 사례들을 치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대권을 노릴 그릇은 안 되는 영남 기반 중진들이 강경 보수 지지층에 기대 적당히 연임하며 지역사회 기득권을 갈라먹어서는 2025년의 호주 보수 정당처럼 파멸적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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