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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평등' 담론의 진보성과 한계

by 삼중전공생 Mar 04. 2025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를 시행해야 한다는 논리는 무엇인가?


사람이 세 명 있습니다. 사탕은 한 개 밖에 없습니다. 세 사람이 공정하게 사탕을 나눠먹고 싶습니다. 그래서 가위바위보를 하려고 합니다. 그건 의사결정에서 세 사람을 동등한 비중으로 참여시키는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사건의 결과가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데, 운이야 말로 모든 사람이 정말로 평등하게 소유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운명의 여신이 누구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삶에 항상 행운만이 가득한 사람은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하며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그런 우연에 의해 결과값이 정해지는 게임의 룰에 일단 모두가 동의하기만 한다면 결과가 개인의 특성이나 폭력, 협박 등 비도덕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으니 그보다 더 공정한 게임의 법칙도 사실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게임의 룰이 공정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든 모두가 룰에 동의를 했으므로 불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제 세 사람은 사이좋게 사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사탕을 먹은 사람은 한 사람 뿐인데, 나머지 두 명도 깨끗히 결과에 승복하니 서로 행복합니다. 이것이 공정의 힘입니다.


룰에 동의를 해놓고, 자기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왔을 때 딴소리를 하는 사람은 합리적인 대화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처벌하는 도덕적 기제도 작동하고 있고, 앞으로 사람들이 신용이 떨어진 그 사람과의 협력을 거부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억지 주장을 하는 사람은 사탕 한 개로 얻은 이익 보다 더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가위바위보에 참여한 세 사람은 모두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런 반칙은 쓰지 않는다고 해둡시다.


이제 사탕이 100만개가 있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걸 나눠먹고 싶은 사람은 10억명입니다. 당연히 10억명의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가위바위보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정한 과정에 합의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가상의 공간에서 가위바위보를 한다고 칩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위바위보가 사탕을 분배하는 공정한 방식이라는데 의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운에 의해 결과를 생성할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 특질이나 비도덕적인 수단에 의해 결과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0억 명 중에 양 손이 없는 장애인이 한 명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지적 장애가 있어서 가위바위보를 할 때마다 항상 주먹만 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노출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면 손의 근육에 문제가 있어서 애초에 항상 주먹만 쥐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3명은 모르겠지만, 10억명 중에는 확률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이 없다고 볼 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가위바위보'의 장점은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결과에 영향을 주는 비중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더 적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거나,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즉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의 과정의 공정함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위바위보는 이제 그런 소수의 사람들을 오히려 차별하는 사탕 분배 방식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다리 두 개, 팔 두 개, 그리고 대체로 IQ가 100 부근인 지능 등은 인간이라는 세포덩어리가 오랜 세월 동안 환경에 적응해옴으로써 만들어낸 특질들이고 그런 환경적 변화에 대한 누적적 적응이라는 자연의 지혜가 담겨있기 때문에 환경이 급변하지 않는 이상, 최고는 아닐지라도 대체로 생존에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신체의 완전성'이라는 다소 차별적인 시선이 담긴 이름으로 불러봅시다. 이 신체의 완전성은 대다수의 인간이 소유한 성질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 사회는 인간이 이 신체의 완전성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짜여지게 됩니다.


가령 우리가 목에 담이 걸려서 침대에서 꿈쩍도 못하는 날을 생각해봅시다. 그건 일시적으로 신체의 완전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때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게 됩니다. 만약 모든 인간이 항상 담에 걸려있다면 그래서 '담에 걸린 목 근육'이 사회에서 '정상성'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런 식으로 침대를 만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왜냐면 일어날 때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힘을 내야 하는 침대는 팔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신체의 완전성'이 한편으로는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목에 담이 걸린 것조차 신체의 완전성을 결손하고 있는 것이 된다면, 세상에 신체가 완전한 사람이란 어디 있을 것이며 애초에 그런 신체의 완전성의 기원과 정체가 무엇인지 의문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만성적인 비염 알레르기 때문에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냄새를 잘 맡을 수 없는 것이 별로 큰 문제인 것 같지 않게 보일 순 있지만 이 사람이 가스가 누출되는 것을 냄새를 맡지 못해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래서 가스 폭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처럼 보이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체의 완전성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주 많을 것입니다. 아주 많아서 사실상 정말로 '완전한 신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인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나 노인, 장애인, 만성적인 질환을 가진 환자 그리고 여성 등은 애초에 이 목록에서 제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성인 남성 중에서도 지능이나 근육을 적정하게 발달시키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제외될 것입니다. 이 '적정하게'의 기준이 삶을 살면서 신체적 혹은 지적 능력 때문에 단 한 번도 불이익이나 불편감을 느낀 적이 없는 정도라고 한다면 그래서 '일시적으로 신체의 완전성을 결손'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정도라고 한다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재미있어집니다. 우리는 자원을 분배함에 있어서 애당초 부당한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모두 멀쩡한 가위바위보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가위바위보로 사탕을 나눠먹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선 우리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신체의 완전성'이라는 관념이 탄생한 기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진 않겠습니다.


어쨌거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에선 그것의 '정당성'을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과연 어린아이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달린 세면대는 '정당한 제 위치'에 달려있는 것일까요? 어린아이들이 그런 세면대를 소비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세면대를 달아주는 인테리어 업체나 건설사는 망할 것이기 때문에 시장이 처벌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청결이 세면대에서 이루어지고 인간에게 청결이란 건강과 온전한 수명을 누리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며 따라서 기본적인 권리라면 그러한 시장의 처벌 기능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애당초 어린아이가 사용할 수 없는 높이에 설치된 세면대는 '잘못된 위치'에 매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당장 전국에 공무원을 투입해서 세면대 위치를 전수조사하고 문제가 있는 세면대를 재설치 하도록 세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도덕적으로 정당화가 되지않는 '부당한 세면대 위치'가 존재한다는 말일 뿐입니다. 제 말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것은 도덕과 도덕주의, 옳고 그름과 실천의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 '부당한 세면대 위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적어도 세면대가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달려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이롭고 합당하다는데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그런 '부당한' 것이 세면대만 있을까요?


'신체의 완전성'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완전한 신체'를 가정하고 설계된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종종 불편감을 느끼는, 그리고 그 수준이 현저하게 심각해서 우리가 다시 되볼아보고 사회적으로 조치를 취해야할 것 같은 것이 '세면대'만 있을까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장애인 엘리베이터나 경사로, 임산부를 위한 주차장, 노인을 위한 더 긴 보행자 통행 시간을 갖는 신호등, 학교 근처 어린이보호구역 등 우리는 '신체의 완전성'을 일부분 결손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미 많은 사회적 조치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민사회에서 많은 인권운동가들이 수없이 많은 시위에 참가하고 정당과 국회의원들과 협상하며 법안으로 만들어내 현실에 실현시킨 지난한 싸움의 결과물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학술적으로는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라고 합니다. 그것을 누구는 '적극적 평등'이라고도 하고 '차별시정조치'라고도 하고 '결과적 평등'이라고도 하고 '절차의 공정'이라고도 합니다. 표현하는 용어가 다양하다는 것은 affirmative action에 대한 관점과 가치 평가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차별시정조치'는 가장 진보적인 축에 속하는 단어입니다. '결과적 평등'은 애당초 affirmative action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가위바위보를 떠올려 생각할 때는 그러한 과정에 문제가 있고, 그것을 교정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해보였습니다. 사탕을 분배하는 방식에 있어 모든 사람들이 결과에 동등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게임의 룰을 적용해야 한다는 발상은 인간의 평등이 당연해진 근대 사회에는 마치 이미 주어진 당위처럼으로까지 보입니다.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가 논쟁거리인 이유는?


그런데 왜 이게 논쟁거리가 될까요? 어째서 affirmative action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까지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그건 affirmative action이 가진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affirmative action을 시행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를 두고 떠드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진지하게 서술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affirmative action의 정당성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현대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혹자는 신좌파 담론이라고 하는 것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에는 나름의 일리도 있지만 그것이 하필 'affirmative action'의 형태로 표현되어야 하는지는 단언컨대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에는 affirmative action이 너무나 당연하고 응당 취해져야 할 조치라고 받아들여지는데, 그 근원적 정당성에 대한 탐구와 이해당사자들에 대한 설득 노력의 부재가 오늘날 '공정' 분쟁의 시원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affirmative action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필연적으로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가 약하냐 심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동전의 양면처럼 '역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가산점'과 '군가산점' 논쟁을 진지하게 관찰한 사람은 2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생각하는 공정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20대 남성과 20대 여성의 정체성이 분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공정 담론'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affirmative action이 직관적 합리성과 진보성에 불구하고 갖는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신체의 완전성'을 결손하고 있는 그룹 중 가장 인원수가 많고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집단을 꼽으라면 단연 여성일 것입니다. 여성의 지능은 남성과 다를 바가 없지만, 여성의 뇌구조 혹은 유아기 학습의 영향으로 인해 '여성의 지적 특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고, 그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으로는 남성과 여성의 해부학적 차이, 가령 근 밀도나 부피의 차이 등이 있을 것입니다. 여성보다 남성이 더 힘이 센 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쉽게 강력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건 페미니스트들도 인정하는 바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이 가장 포인트를 잡아 사상을 전개해나가는 사회적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여성이 '신체의 완전성'을 결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인격체로써 사회의 자원을 분배하는 게임에 동등한 플레이어로 대우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위의 가위바위보 사고실험과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3명의 경우가 아니라 10억명의 경우에 더 가깝습니다. 여성의 수가 많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들이 사회의 자원을 분배하는 게임에 동등한 플레이어로 대우받을 수 있는 그런 조치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전적으로 이들이 실제 현실에서 '여성으로서의 신체적 불완전성'으로 인해 받는 차별에는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밤늦은 시간에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 느끼는 공포감, 화장실을 사용할 때 느끼는 불법촬영에 대한 공포감, 공공장소에서 의식하게 되는 소위 '시선강간'에 대한 공포감, 심지어는 하이힐을 신고 패인 보도블럭을 걷는데서 오는 불편감도 그러한 차별에 해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실제 페미니즘 교육에서 언급하는 이야기들입니다. affirmative action은 이 모든 상황에 정부가 개입하도록 만듭니다. 밤늦은 길거리에는 여성 안전 귀가 도우미를 배치하고, 공중화장실에는 경찰들이 주기적으로 불법촬영 여부를 조사하게 하고, 수많은 공중장소에 '여성 전용' 무언가를 만들어 여성들만 모여 있을 수 있도록 하고,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은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도 불편하지 않게끔 다시 갈아엎게 만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가 평등한 가위바위보를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서 조치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affirmative action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차별'을 '시정'하는 조치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affirmative action의 본래 취지를 제대로 살려서 번역하면 '적극적 우대조치'라는 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건 '우대'가 아니라 '교정'입니다. 누군가를 더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남들과 평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리가 불편한 노인이 전동휠체어를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주는 것을 노인 '공경'일지언정 '우대'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우대는 가령 이코노미석 좌석만큼 돈을 냈는데 항공사가 나를 좋아해서 퍼스트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해주는 것이 '우대'입니다. 그 둘은 동일하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살펴봤던 여성에게 주어지는 '차별시정조치'는 어떤가요? 우리가 이때까지 따라온 논의대로라면 그러한 affirmative action을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누군가는 그러한 affirmative action을 보고 모종의 '불편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 '불편감'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affirmative action이 사상적 배경으로 두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워버리는 중요한 다른 가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백래시(Backlash)가 아닙니다. 반동분자의 발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정하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affirmative action이 가지는 첫번째 한계는 문제의 본질을 호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 맥락에 충실한 문제점 지적입니다. 둘째는 정부의 권능에 대한 무한한 확신과 그 담론 속에서 사라진 주체들 간의 자유로운 합의와 논의입니다. 이것은 자유주의 내지는 공화주의적 맥락에 충실한 문제점 지적입니다. 



문제① :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


먼저 전자를 살펴보면, affirmative action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문제적 상황이라 생각하는 것이 등장하면 일단 '정부'에게 달려갑니다. 그래서 법안을 만들든, 행정부가 긴급하게 무슨 조치를 취하도록 합니다. 그러고 나서 급한 불이 꺼지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성 안심 귀가 도우미가 전국에 배치되면 여성이 밤거리를 돌아다니는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니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고려해보면, 그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여성이 귀갓길에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회의 치안과 관련된 여러가지 제도적 문제들 혹은 문화적 문제들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이 귀갓길에 두려움을 느끼는 까닭은  여성이 귀갓길에서 안심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부당한 공격을 받거나 범죄에 노출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성의 신체적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그건 정부가 세금으로 귀갓길 도우미를 배치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여성들이 서로 연대함으로써 '불안한 귀갓길'과 투쟁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길바닥과 싸움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의 귀갓길을 안심할 수 없게 만드는 수많은 '원인'들과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건 시민들에 대한 경찰력의 낮은 신뢰도 문제, 우범지대를 방관하고 있는 시도청의 도시계획 담당 공무원의 무사안일주의 문제, 여성의 불안감을 저평가하거나 무시한 채로 서로 의미없는 정쟁에 몰두하는 시도의회 혹은 국회의원의 문제 등등 나의 귀갓길을 불안하게 만든 것에 책임이 있고, 더이상 나의 귀갓길을 불안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싸워 이기거나 아니면 직접 그러한 사람들이 됨으로써 '불안한 귀갓길'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당연히 여성 개인이 힘을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성들이 연대하고 힘을 합쳐야 겨우 이뤄낼 수 있는 거대한 문제들입니다. 그건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시혜성으로 '여성 안심 귀갓길 도우미' 따위를 세금으로 배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affirmative action은 이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일단 affirmative action이 작동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같은 장애인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도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설치했느냐가 더 사안의 본질에 가까울 수 있으나, affirmative action에는 그러한 맥락적 담론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시도청 공무원이 시끄러운 민원에 지쳐 대충 허가한 엘리베이터인지, 장애인들이 연대하여 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내는 과정 속에서 설치된 엘리베이터인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건 포스모더니즘적 맥락에서도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문제② : 사람들 간의 자유로운 논의와 합의의 실종


둘째 문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이 근래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정' 담론의 본질적 원인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affirmative action은 정부의 권능에 대한 무한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affirmative action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닙니다. 정부도 결국 신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내가 수백만명의 사람들의 도시계획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봅시다. 내가 아무리 도시계획에 통달했다고 하더라도 수백만이 살고 있는 도시 운용의 모든 변수를 다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affirmative action을 고려한다고 하면, 그것으로 인해 초래될 다른 사회적 변수들에 대해서는 나는 거의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정책적 필요가 나에게 전달되면 나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는 항상 관료의 머릿 속을 앞질러 갑니다. 내가 초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순간에는 이미 골든타임은 모두 지나가있거나 제한된 정보와 변수만을 고려한 채로 머릿속에 떠올린 해결방안이 대단히 비루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가령 여성 전용 도서관 같은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건 정부가 페미니스트여서 그런게 아니라, 공무원 집단이 affirmative action 같은 민감한 담론을 예리하게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조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공무원 집단의 본질입니다. 사기업에서 프로젝트가 엎어지고 일이 꼬이는 것은 나의 연봉과 승진 혹은 퇴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나의 일입니다. 그러나 공무원은 아무리 affirmative action 조치가 잘못되거나 무리하게 강행되어도 나의 일이 아닙니다. affirmative action에 관한 민원이 들어오고, 나는 힘이 들고, 그래서 해주고 나서의 사회적 분쟁 유발은 자기가 알 바가 아닌 겁니다.


affirmative action이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있고 사회 진보에 유익한 담론일지언정, 그것을 현실에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와 같은 방법론적 논의에서 늘 '정부'만 끌고 와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정부의 한계가 곧 affirmative action의 한계가 될 것이며 정부의 한계는 적지 않은 경우에 affirmative action의 정당성과 합목적성을 동시에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에 affirmative action은 정부에 의존하는 한 구조적으로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담론 속에서 사라진 '주체들 간의 자유로운 합의와 논의'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affirmative action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공장소에 '여성 전용' 무언가를 설치하는 것은 단순히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공공기관 '여성가산점' 제도나 각종 모든 '여성할당제'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여성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여성이 아닌 사람들도 그러한 조치가 시행되기 이전에 발언할 기회를 얻어야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 가산점이나 할당제로 인해서 기회가 좁아지게 될 다른 잠재적인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작금의 affirmative action은 그러한 과정이 전혀 있지 않습니다. 여성단체들은 affirmative action이 작동하기만 하면 되고, 행정가들도 더 이상 그런 민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될 뿐입니다. 주요한 이해당사자인 둘 모두가 제3자가 목소리를 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성이 아닌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회 도처에 많은 affirmative action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affirmative action은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기회를 더 열어두는 대신 누군가의 기회를 더 닫아두게 되는 조치입니다. 특히나 가산점이나 할당제와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성 집단'이 차별을 받고 있는 것과, '여성이 아닌 한 사람'이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원래 자리를 맡아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관행과 제도대로 였다면 중요한 사회적 지위나 자리를 자신이 얻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합리적 기대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됩니다. 제도나 관행의 존재 자체가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합리적 기대로써 예측가능한 선택과 행위를 하도록 돕는 장치들이기 때문입니다.


affirmative action이 사회 전체에 대한 설득이나 호소의 노력 없이 지금처럼 행정가들과 일부 이해당사자들끼리만 확장되고 심화된다면 사회적 갈등은 그것에 비례해서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임계점을 넘으면 나중에는 소외된 집단은 affirmative action 자체에 대해 부정함으로써 합리적 대화라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질 정도로 갈등적인 상황이 연출될 지도 모릅니다. 공론장에 부쳐지지 않은 affirmative action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affirmative action은 그 직관적 타당성과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분명한 한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누가'. '언제', '어떻게' 차별을 겪고 있으며 그 문제를 '누가', '언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는 '누가', '언제',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런 합의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한계들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affirmative action은 그저 '의도만 좋았다'일 뿐 현실적으로는 폐기해야 할 담론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affirmative action은 단지 해야하는 것, 주로 여성단체들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affirmative action은 당연히 정당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정당성을 상실했다는 말은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affirmative action의 실제적 정당화가 가능할지,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대안 이념으로는 무엇이 있을지 한 번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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