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 계절을 묻지 않았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by 애린 이종희

씨앗은 계절을 묻지 않았다/ 이종희


지난 가을, 메밀꽃 흐드러진 들판을 거닐다 손바닥에 몇 알의 씨앗을 얻어왔습니다. 젖은 솜 위에 씨앗을 올리고 가만히 물을 주었더니, 얼마 뒤 조막만 한 몸이 제 안의 틈을 밀어내며 기어코 첫 싹을 틔워냈습니다.


계절의 순서를 거스른 채 겨울로 직진하는 창가였지만, 씨앗은 기어이 꽃을 피워냈습니다. 그 희고 작은 꽃은 들판의 장관과는 비할 바 없었으나, 적막 속에서 숨을 죽이고 피어난 하나의 경건한 사건이었습니다.


겨울의 빛은 늘 야위고 짧았지만, 그 작은 존재는 단 하루도 성장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버틸 만큼만 잎을 내고, 닿을 만큼만 꽃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기적처럼 추운 겨울 한복판에서 씨앗을 맺었습니다. 메밀의 짧은 생은 계절을 거스른 소란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결핍 안에서 계절과 조용히 합의하며 일궈낸 최선의 리듬이었습니다.


뒤늦게 사진이라도 남기려 렌즈를 가져다 댔을 때, 씨앗은 이미 제 소임을 다하고 종적을 감춘 뒤였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었습니다. 솜 위에서 사투를 벌였던 그 치열한 시간만으로도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완성되었으니까요.


돌아보면 이런 기적들은 우리 곁에서 쉼 없이 일어납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쏟아지는 일정표와 자극적인 뉴스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하루를 통과할 뿐입니다.


어떤 마음들은 솜 위에서 간절히 방향을 찾고 있었을 텐데, 우리는 눈앞의 걱정을 갈무리하느라 그 소리 없는 개화와 낙화를 너무 많이 놓치며 살았습니다. 지난 한 해도 결국 그렇게 건너온 날들의 합이었을 것입니다.


대단치 않아 보여도 분명히 자라나던 순간들,

부족한 조건 속에서도 끝내 꽃을 피워냈던 다짐들.

미처 기록하지 못했을 뿐, 삶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저마다의 속도로 결실을 준비해 왔습니다.


새해에는 늦었다는 이유로 서랍 깊숙이 밀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 보고 싶습니다. 그 작고 단단한 결실이 누군가의 얼어붙은 시간 속으로 건너가, 또 다른 봄을 부르는 씨앗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11월의 메밀꽃

12월의 메밀 씨앗은 떨어지고...




방문해 주신 모든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늘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