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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김장은 쉬어갑니다

몸은 편해도 맘은 안 편해요

by 오즈의 마법사

예년 같았으면 지금 한창 몸과 마음이 분주할 시기이다. 이미 고춧가루는 열 근을 사두었을 테고, 지금쯤은 절임 배추를 언제 받을 건지에 대해 납품업체와 택배 날짜를 조율 중일 것이다. 20년째 거래하는 재래시장 젓갈 가게에 가서 무엇을 얼마나 살지 목록도 빽빽하게 적어놓았을 것이다. 혹시나 빠뜨린 것은 없는지 목록을 살피고 또 살폈을 터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주 한가하다. 고춧가루도, 절임 배추도, 시장 볼 목록도 올해는 피해간다.


지난해 11월 말, 김장 김치를 담글 때는 여섯 가족이 다 모여서 했다. 아들 내외, 손자 둘 그리고 우리 부부가 가족 완전체이다. 아이들이 오기 전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마, 멸치, 황태 머리, 양파, 파 등을 잔뜩 넣고 육수를 먼저 낸다. 찹쌀풀을 끓여 식기를 기다린다. 내가 갓 세 단을 칼로 썰어서 한 양동이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무 세 개를 채칼로 썰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전날 시장에서 보아 둔 마늘, 액젓, 새우젓, 청각을 꺼내어 김장 매트에 붓는다. 갈아온 배와 마늘 그리고 생강을 매트에 넣고 식은 육수와 찹쌀풀을 붓는다.


그럴 즈음이면 아이들이 도착한다. 장정인 아들이 도착하면 김장 김치 담그기에 돌입한다. 열 근의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들을 골고루 섞으려면 힘이 필요하다. 남편과 아들이 그 일을 도맡아서 하는 편이다. 양념이 골고루 저어졌으면 아들 내외와 남편은 김장 매트에 둘러앉아 김치를 버무리는 역할을 한다. 손자 둘에게도 김치통을 하나씩 주고 앞치마를 입혔다. 김치통에 양념을 덜어주고 절임 배추 몇 포기를 주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법 김치를 버무리는 걸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손주들이 5살, 6살이 되니 이제 같이 김치도 담그게 되었다. 이전 해까지만 해도 손자들은 며느리와 집에 따로 떨어져 있었다. 손자들의 얼굴은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할머니, 제가 담은 김치통에 제 이름 써 붙여 주세요.”

“그래, 알았어. 요건 하성이, 요건 하유.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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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들은 자기 이름이 붙는다니까 더 열심이었다. 나는 절임 배추와 김치통을 가져다주며 잠시 후 먹을 만찬을 준비한다. 김장철에 빠지면 섭섭한 것, 그건 바로 수육이다. 남편이 좋아하는 홍어도 한 접시 준비하고, 며느리가 좋아하는 자연산 생굴도 준비한다. 거기다가 막걸리 한 사발에 방금 담은 김치를 손으로 쭉 찢어 수육에 올려서 한 입 먹으면 노동의 피로가 확 풀리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고된 노동이지만 가족 완전체가 함께여서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올해 초, 큰 손자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발병되면서 우리 집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 전 작은 손자 하유가 아들에게 말했단다.


“아빠, 이번에도 할머니 집에 김장 김치 담그러 갈 거지?”

“글쎄다. 형아 알레르기 때문에 못 갈 수도 있는데.”

“아니야, 형이 허락해 줄게. 하유는 할머니 집에 가서 김치 담그고 와.”


그 말을 전해 들으니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다. 손자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지도 못할 텐데 김장이 뭔 대수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그렇기도 하지만 작년에 김장 김치를 13통이나 담그는 바람에 아직 김치가 4통이 남아 있기도 했다. 사돈께도 드리고, 아들네도 가져가고, 친구에게도 나누어 주었는데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결국, 올해는 김장 김치를 담그지 않고 쉬어가기로 했다. 모자라면 그때그때 조금씩 담가 먹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만 딱 한 명이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엄마인 내가 집에서 요리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김치를 담그는 날에는 뛸 듯이 좋아해서 입이 연신 벙싯거렸다. 아들이 좋아하는 그 일을 나는 30대 초반부터 매년 해왔다.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김장 김치 담그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친정에서 담글 때도 항상 같이 가주곤 했다. 남편보다 아들이 더 김치를 잘 담그는 이유도 오랜 경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남편도 김장 김치를 담그는 날에는 휴무를 내어 같이 한다.


아들도 거의 20년 넘게 김장 김치를 담았는데 올해는 쉰다면 서운할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큰 손자의 알레르기가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 치료 중이니 빨리 나아지길 기도한다. 내년 김장 김치 담그는 날엔 가족 완전체가 모여 김치통에 자기 이름을 붙이게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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