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간 후에야 너 온 것을 아는 가슴 새벽비처럼 시린 걸 아느냐
이 시는 시인 [ 화자 -> 청자 ] 독자의 대화 구조를 가진다. 여기서 시인은 곧 화자이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하기도 하다. 시에서 화자는 나로, 청자는 너로 배치된다. 그리고 시는 화자가 청자에게 ‘말건넴’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와 너 사이에는 방과, 뒤란으로 지나가는 소슬바람과, 티끌과, 벽과, 길과, 마루기둥과, 동구 밖 초입이 있다. 어투로 보아서 너, 는 아랫사람이리라. 그렇다면 이 시는 연시는 아닐 것이다. 구둑구둑한 호박씨를 졸며 까는 사람이, 대체로 남정네가 아니라는 면에서 이 시의 너는 여인네이리라. 여인네에게 너라고 지칭될 아랫사람이란, 아마도 자식이리라. 그렇다면 이 시는 세상에 나간 자식에 대한 애끓는 모정을 노래한 것이 될 것이다. 부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선 그렇게 두고 읽자. 이 시에서 나와 너는 각각 누구든 될 수 있고, 무엇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게 이 시가 가지는 모호성이자 특성이다. 그리하여 이 시는 시적 미학과 예술성을 획득하려 한다.) 뒤란으로 소슬바람이라도 지나갔느냐 한다. 소슬바람은 가을에 으스스할 정도로 외롭고 쓸쓸하게 부는 바람이다. 뒤란으로 소슬바람이 지나가며, 외롭고 쓸쓸함으로 꾀어내더냐, 하고 묻는 것이리라. 졸며 호박씨를 깔 만큼 무료함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 창틈 햇살 속을 떠도는 티끌을 발견하는 순간에 소슬바람이 지나가며 발현되는 각성 같은 것일 테다. 문득 생기는 궁금증과 조바심 같은 것이 가슴을 울려서, 그러니까 마음이 동해서 길을 나섰느냐고 묻는다.
네가 온다니 나는 또 가슴을 앓는다. 네가 가서 어떻게 살았을지 노심초사했기에 가슴을 앓았고, 네가 어떤 모습을 할지 염려되어 가슴을 앓고 있고, 네가 오면 필시 또 가야 할 것을 알기에 가슴을 앓는다. 영 기별할 줄 모르게 바람꽃으로 와서 시골 간이역에 오롯이 서 있는 우체통처럼 마루 한쪽에 있다가 기침도 없이 가느냐 한다. 기별도 없이 불쑥 와서, 사실 기별을 했다 해도 느닷없이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시골 간이역에 오롯이, 그러니까 외롭고 쓸쓸하게 서 있는 우체통처럼 앉아 있다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가느냐 한다. 이 행간이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일게다. 독자의 기억과 경험, 상상력이 끄집어내야 할 이야기다.
네가 간 후에야 너 온 것을 아는 가슴 새벽 비처럼 시린 걸 아느냐. 한다. 너 와도 온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을 못하는 모정이다. 그러다가 네가 가고 나서야, 마루에 덩그러니 남은 네 체온을 느끼고, 마루기둥 아래에서 아직도 너를 따라가지 못한 네 그림자를 발견한다. 이 애끓는 가슴이 새벽비처럼 시린 걸 아느냐, 한다. 동구 밖 초입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으면 언제 오느냐. 온다 간다 기별이 없으니 언제 올 줄을 모르고,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동구 밖에 나가 넋 나간 사람처럼 서성이는 늙은 어미의 심정을 아느냐. (또는 아비의 심정이어도 상관없다.) 언제 또 오느냐.
이 시의 매력(?)을 구태여 들자면 시적 화자와 청자, 나와 너의 모호성에서 출발하는 확장성이다. 추론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추론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추론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따질 필요가 없다. 독자는 그저 시가 전하는 심상에서, 각자의 기억과 경험에 대입해 음미하면 되겠다. 시는 너, 와 나,라는(여기서 나는 한 번도 직접 언급된 적이 없지만) 명확한 두 개의 줄기가 곧게 뿌리를 내리고 있고, 두 줄기 사이를 내통하는 수분과 공기들이 숨 막히도록 빈틈없이 구조되도록 나름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