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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인, 셀프 시평 #4 설거지를 하면서

젖은 손을 갑문처럼 여닫아 묵은 바다를 비우고

by 정건우 Mar 20. 2025



식사 후 설거지는 당연하게 내 못이다. 언제부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일이 돼버렸다. 은퇴 후 실종됐던 아내에 대한 사랑이 돌아왔냐고?. 물론 아니다. 이건 뒤늦은 아내 사랑에의 발로라든가, 불현듯 접수한 가사 노동의 배분 원칙이라든가, 사람이 좀 염치가 있어야지 하는 타박에서 기인한 억지스러운 의식 변화도 아니다. 이 정도는 능히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자각에서 오는 반성적 실천행동이라고 보면 무방할 듯하다. 어찌 됐든 나는 즐겁고 당연하게 설거지를 한다.

     

직장 생활 중, 직원 상호 간의 유대감 강화 차원에서 실시하는 단체 합숙 교육에 종종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식사도 직원들이 직접 준비하는 교육이었는데, 각 분야별 담당자 선발에 설거지 파트에 유독 지원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설거지를 쉽게 보는 경향에서 그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보기보다 그리 만만하게 볼 뒤처리가 아니다. 대충 닦고 포개면 끝이라는 따위의 행위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빈 그릇 수거부터 잘해야 한다. 부피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을 포개 옮기는 것은 기본이고, 취급 부주의로 접시의 이가 나가거나 깨뜨리는 불상사가 일절 없어야 한다. 쓰고 남은 식용유, 잔반 등은 분리 처리도 해야 하고, 식기의 기름기는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꼼꼼하게 닦고 철저하게 헹군 후 충분하게 건조해서 정리해야 마무리되는 게 설거지다. 행주와 도마의 소독, 싱크대 주변 청소, 청결 유지도 당연히 그것의 범위다.

    

아내는 자그마치 이 노동을 삼십오 년 가까이해 왔다. 하루 세 번씩 계산하면 삼만 팔천 번이 넘는다. 그 무수했던 시간 속에서 아내는 어떤 생각을 하며 여기에 서 있었을까?. 가족의 입으로 들어간 음식을 담은 그릇은 그 자체로 내 살붙이나 마찬가지다. 선박을 수리하는 조선소에 독(dock)이라는 시설이 있다. 물을 빼고 채우는 방식으로 수리한 선박을 다시 바다로 보내는 장치다. 그런 것처럼 오염된 살붙이 같은 식기를 수만 번 어루만져 가족의 배를 채우고 다시 바다로 보낸 아내다. 세상에, 주방이 아내의 바다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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