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의 이야기
솔직히 말하면 슬프긴 했는데, 그럴 줄 알았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 감이라는 게 있잖아.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큰언니 보면 오래 못 살겠구나 싶었어.
한이 쌓여도 그걸 잘 풀어내고 순환시킬 줄 알아야 하는데, 큰언니는 그걸 못했어. 있으면 있는 그대로 그냥 다 먹어버리고, 제대로 뱉어내지도 못하고... 무작정 삼킬 줄만 알았지, 걸러내는 법을 몰라.
그런데 또 나는 그게 미련하단 생각은 안 들어. 그렇잖아. 그때 누구한테 말할 수 있었겠어. 있는 건 어린 동생들과 딸한텐 관심 없는 아버지 뿐이고, 할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들한테 얘기한다고 해도 그 애들이 뭘 알겠니? 세상 만사 다 직접 겪어야만 아는 거 아니라고 하지만 어떤 일은 겪어야만 아는 것도 있는 거야.
그냥 꾸역꾸역 삼키는 게 답이지. 우리 첫째 언니가 그렇게 연못을 좋아했어. 이 마을에 있는 그 연못 말이야.
예전엔 거기서 노는 애들도 많고, 지금처럼 조용하진 않았잖아. 그런데도 거기가 좋대. 그래서 나는 큰언니가 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가만히 돌이켜보니까 그게 아니라 거기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던 건가.
아니지. 그것도 아니었던 거 같아. 그냥 어디 멀리 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맑은 물이라도 보자는 심정 아니었을까.
애를 그렇게 예뻐하는데, 그 여자가 낳은 애도 애라고 안고 보듬었는데, 자기 새끼면 얼마나 예뻤겠어? 그 예쁜 거 알뜰살뜰 키워보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망가진 거야.
나는 언니들이 너무 불쌍해. 세월 지나면 다 잊혀지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그렇지도 않아. 자꾸 떠올라. 큰언니도 그렇지만, 다섯째 언니는 더 그래.
그 언니는 항상 할머니한테 칭찬받고 싶어 했거든. 아줌마한테도 마찬가지고. 아마 아버지한테도 그랬을 거야. 어른들의 칭찬을 받고 싶어 했어. 뭘 하나 하더라도 꼭 어른들 생각을 헀지.
다섯째 언니 하면 그림 생각이 나. 왜, 그런 거 있잖아. 아이들 학교 다닐 때 꼭 그림 숙제 내주는 거. 그 언니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던 거 같아. 추측만 하는 거지, 나는 다섯째 언니랑 친하지 않았으니까.
어릴 땐 그저 하는 행동 하나 하나 전부 한심해보였어. 어떻게 해서든 어른들 눈에 들어보겠다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꼭 똥 덜 닦은 사람처럼 보였거든. 그림 그려서 가져온 그날도 그랬어. 나는 볼 생각이 없었는데, 그 언니가 먼저 너는 안 보여준다고 하는 거야.
심술났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면 그냥 넘어가면 될 걸, 그게 왜 그렇게 심술났을까? 그땐 언니들이 거의 다 집을 떠난 뒤였어. 내 방이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그 언니는 나이가 조금 더 많다는 이유로 떠난 언니들 방을 혼자 쓰는 거야. 근데 나는 아직도 막내 언니랑 방 같이 쓰고.
방이 더 있긴 했는데, 내 방이 될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무조건 귀남이, 귀남이... 그놈의 아들 타령... 시내에 나가서 있는 장난감 없는 장난감 다 모아서 방을 하나 만들어 준 거야. 어리면 그게 질투라도 나야 하는데, 그럴 줄 알았단 생각만 들었지. 그러면서 다섯째 언니는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어쨌거나 난 그 언니가 보기 싫어서 방에 들어갔거든. 그린 그림을 거실에 잘 보이도록 펼쳐놓고 왔다갔다하면서 어른들 눈치 보는데 너무...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보기 싫더라고. 왜 저러나 싶고.
그렇게 방에 한참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운 거야. 문 닫고 있었고, 나 같은 거 신경 쓰는 사람도 없어서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걸. 어른들이 소리 지르고 있는 걸 보면 보나 마나 그 여자 아들 때문일 텐데, 애도 안 돌보고 뭐했냐고 혼날 게 뻔하니까 나가기 싫었지.
그냥 안 나갔으면 나았을까? 그날따라 너무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거실이 보일 정도만 문을 열었는데, 다섯째 언니가 자기 그림을 찢고 있더라고.
막내가 한참 보이는 것마다 입에 넣을 때였거든. 어른들 보여주겠다고 펼쳐놓은 그림을 그대로 입에 넣은 거야.
구겨진 자국 남을까 가방에 넣지도 않고 돌돌 말아서 가슴에 잘 품고 왔던 그림인데, 귀남이 입에 들어갔다고 그걸 다 찢어버리는 거야. 입에 넣은 애는 놀라서 울고 난리 난리...
결국 입에서 종이 뱉어내는 것까지 보고 그 언니가 멈추더라고. 바닥에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종이가 꼭, 학교 축제 같은 거 하면 꽃가루라고 하나? 그거 흩날리잖아. 꼭 그거 같았어.
아줌마가 우는 막내 달래는 동안, 화장실에 있다가 아들 울음 소리에 바지도 제대로 못 입고 뛰쳐나온 아버지는 상황이 정리된 걸 보고 옷을 추스르더라. 거실로 나와서 다섯째 언니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거야. 그러더니 하는 말이 “잘했다, 앞으로 귀남이가 뭘 먹으면 은정이 네가 말려라.”
근데 은정이는 넷째 언니 이름이고, 다섯째 언니 이름은 신정이거든.
그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릴 땐 나쁜 마음이지만 좀 꼬셨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면서 잘하려는 척하더니 결국 저런 취급만 받는다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섯째 언니도 나한테나 언니였지, 학교에서 그림 숙제 받아오는 애였잖아. 기분이 어땠을까. 그때의 나는 왜 그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내가 그 언니를 먼저 끊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또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 언니가 버린 거야. 거기엔 아마도 그날 아버지의 태도 탓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