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려보니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의 현정이 내 옆에 붙어서 기웃거리고 있다. 그는 늘 임순희 어르신을 모시고 다녔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혼자다.
“무슨 일이...”
“어르신은 어쩌고 혼자 다녀?”
미윤이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넋 나간 영연을 보며 혀를 쯧쯧 차던 현은이 냉큼 묻는다.
순간 현정의 표정 위로 짜증이 스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표정 관리하며 대답한다.
“어르신이 잠드셔서요. 잠깐 집에 다녀오려는데 큰 소리가 나길래 와봤어요.”
“어머, 그래?”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현은은 현정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임순희 어르신과 현정의 집은 이장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마을회관 옆, 문 닫은 슈퍼와 빈 상가를 지나 이장의 집이 있는 쪽을 등지고 안으로 걸어가야 현정의 집이 보인다. 현정의 집 기준으로 왼쪽엔 내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집이 있고, 오른쪽엔 석혁이 혼자 사는 집이 있다. 현정의 집 앞엔 빈 상가가 있고, 집 뒤엔 임순희 어르신 댁이 있다.
집 보상금 문제로 연못 마을에 내려왔을 때, 현정이 마을 내 가장 나이 드신 분을 모신다는 사실을 알고 여기는 참 변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르신을 맡게 된 이유 같은 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이 마을에 사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서 마을 밖을 나가본 적 없는 토박이 중 가장 어린 게 현정이기 때문이다.
뻔하지. 만약 내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면, 어르신을 모시는 일은 곧 내 일이 되었을 거다.
나이가 더 어리고 이장 옆에서 마을 일을 빠삭하게 알며 돕기도 하는 영연이 있음에도 현정이 어르신을 모시게 된 건, 아마 영연이 연못 마을 출신이 아닌 다른 마을에서 태어나 희운과 결혼하면서 이 마을에 살게 된 사람이기 때문일 거다.
까탈스럽다고 말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고, 현정 또한 그 일을 하기 싫었겠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순 없었을 거다.
원래 사람이 셋만 있어도 의견이 다른 한 명은 남은 두 명의 의견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모인 인원이 극소수라고 하더라도 반대를 비추긴 쉽지 않단 뜻이다. 현은처럼 자기 원하는 거 하고 살아왔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부모가 길을 깔아주지 않으면 모를까.
싫다의 ㅅ도 입에 올려보지 못하고 그대로 떠맡은 어르신은 그의 인생에서 큰 짐이 됐을 거다. 귀찮고 짜증나겠지. 살 부벼가며 함께 살던 가족마저도 지긋지긋할 텐데, 마을에서 오래 봤다는 이유로 아픈 노인의 수발을 들게 생겼으니.
임순희 어르신이 잠시 잠드셔서 잠시 집에 다녀오려다가 소리를 들었다고 하기엔 현정의 집과 이 장소는 거리가 있다.
워낙 조용해서 작은 소리 하나도 잘 들리고, 차 소리에 익숙한 미윤과 다른 현정이 서울 여자들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은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아무리 어르신이 주무신다고 해도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어르신의 몸이고, 항상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게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인데. 자기 가족 아니라고 그렇게 막 대하는 거 아니야.”
현정은 그저 미소를 짓는다. 한두 번 듣는 소리가 아니라는 태도. 그러니 깊게 생각하지도, 귀담아 듣지도 않겠다는 태도.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혀를 차던 현은이 한 마디 더 하려고 한다. 그 순간 서울 여자들과 이야기하던 영연이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한다.
미윤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고개를 돌린다. 자신의 허벅지를 퍽퍽 소리 나도록 내려치다가 끝내 바닥에 주저앉는데, 두 다리를 동동 구르는 꼴까진 보고 싶지 않다.
왜 저런 태도를 보일까? 영연이 집을 팔아서 첫째 아들에게 보상금을 퍼주고 싶어 한단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희운이 알아서 서울 여자들에게 집과 보상금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봤다는 걸 알았으니, 오히려 더 좋은 기회 아닌가?
잘 구슬리고 들쑤시면 마음을 돌릴 수 있다. 이장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 희운의 속내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걸 잘 써먹을 생각이 없는지, 요령이 없는진 몰라도 다 큰 성인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바닥을 구르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대충 상황 파악을 끝낸 현정이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는 게 보인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현은에게 욕을 얻어먹을 게 뻔하다.
다행히 지금 현은과 뒤늦게 따라 나온 정연의 시선이 온전히 영연에게로 가 있다.
자리를 몰래 빠져나가려는 현정의 옆에서 같이 가자고 눈짓한다. 미윤을 힐끔 바라본 그는 말없이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