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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 내용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 추가 없이 금요일에 올립니다.

by 이홍

현정의 이야기


지긋지긋하다니까. 나는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한 게 한이야. 오죽하면 내가 언니들에게 부탁했겠어, 내가 죽었을 때 만약 언니들이 살아 있거든 절대로 나를 이 근처에 묻어주지 말라고.

마음 같아선 그냥, 지금 사는 집도 싹 불 질러서 없애버리고 도망가고 싶어. 매일 매일 숨통이 막힌다니까. 무슨... 이걸 뭐라고 표현하지? 엄청난 온도로 절절 끓어대는 사우나에 갇혀 있는 기분이라니까.

그래도 예전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했는데, 나이 드니까 이제 그것도 잘 안돼. 어려워. 그러니까 맨날 후회하고 사는 거야. 둘째 언니가 집 나간다고 했을 때 무작정 뒤쫓아갈 걸.

그땐 뭘 몰랐지. 하나 있는 아버지, 그것도 내 부모라고 나를 위할 거라고 믿었으니까. 아무리 어렸다고 해도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걸 부모라고 생각했나몰라.

불쌍한 우리 엄마 죽고 장례식 치르는데, 우리 엄마랑 가장 친하다고 말하던 여자가 아버지 아들 배가지고 왔잖아. 세상에, 말 못 하는 짐승 새끼도 그런 짓은 안 할 거다. 미친년.

우리 엄마가 아들 낳겠다고 나까지 딸만 일곱을 낳았는데, 그것도 아버지 엄마가 닦달해서 그런 거잖아. 나 낳을 땐 기대도 안 했다고 하더라. 애 낳자마자 계집년 낳아놓고 무슨 낯짝으로 누워 있냐고 들들 볶아서 하루도 못 쉬었잖아. 거기서 병 얻어서 죽었는데...

첫째 언니가 그랬어. 엄마가 힘들 때마다 집까지 찾아와서 위로해주던 여자가 막내 낳은 그 여자라고. 그러니까 그 여자는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집에 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버지랑 뭐 어떻게 붙어먹고 싶어서 간 보느라 집에 찾아온 거라고.

그것도 모르고 우리 엄마는 그 여자한테 고마움 느껴서 힘들게 살면서도 그 여자한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다고. 어쩐지 엄마가 나를 임신한 이후부터 슬슬 안 보이더니 지도 새끼 배가지고 안 보인 거라고.

그땐 언니들 말만 들었지. 항상 내 곁엔 언니들만 있었거든. 엄마 장례식날 엄마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이 아버지 애 배서 들어오니까 얼마나 놀랐겠어? 할머니도 뒤집어지려고 하는데 그 여시 같은 게 그런 상황 예상하고 바로 자기가 가진 애 아들이라고 했대.

나는 어려서 기억 안 나지. 사실 우리 엄마 얼굴도 기억이 안 나. 따져보면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없는 것 같아. 난 모르니까.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죽었는데 내가 뭘 알겠어. 그냥 언니들이 하는 말 들으면 그렇구나... 하는 거지.

할머니는 아들이라는 말에 눈이 돌아가지고 그 여자를 집으로 들였는데, 그때 생각하면 그냥 첫째 언니가 미쳐버리려고 했던 게 기억나. 큰언니가 애를 좋아했거든. 동생이 태어나면 그렇게 기뻤대. 자기는 나중에 커서 꼭 학교 선생님 될 거란 말도 하고.

다른 집이면 몰라도 우리 집은 딱 그거였어. 계집애가 시집가서 애나 낳으면 되는데 뭐하러 돈 들게 공부하냐고. 집안 대를 잇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큰언니는 그렇게 애를 좋아했지. 지금 태어났으면... 아니지, 다른 집에서 태어났으면 지금쯤 선생님에서 은퇴했겠다. 다 큰 제자들 가끔씩 만나면서 행복하게 살았겠지. 불쌍한 우리 첫째 언니.

언니가 애를 좋아하는데, 그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까 애 돌볼 사람이 필요한 거야. 그 여자가 돌보는 건 나중 일이었어. 아들 낳은 귀한 몸이니까 상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할머니가 물 한 잔도 직접 떠서 못 마시게 했거든. 우리 엄마는 나 낳고 바로 일하다가 병났는데.

그러니까 막내가 그대로 큰언니 손에 넘어간 거야. 언니 속이 어땠겠어? 죽은 엄마 생각도 나고, 아버지한테 배신감도 느끼고, 할머니가 밉고, 태어난 애가 싫었을 텐데 또 애라고 예뻐하는 거야. 근데 그 속이 속이겠냐고.

막내는 이름이 있어도 집에선 귀남이라고 불렸어. 아직도 기억난다. 할머니가 그놈의 고추 좀 보자고 한바탕 난리 치고, 큰언니한테 애 좀 잘 재우라고 안긴 다음에 방에서 쉬고 있는 그 여자한테 갔거든.

귀남이 안고 서 있던 큰언니가 엉엉 우는 거야. 눈물이 막 떨어지는데 막 이 악 물고 흐으, 흐으 이런 소리만 내더라. 그러면서 품에서 잠들기 시작하는 애 얼굴에 눈물 떨어질까봐 손으로 막아주고.

우리 둘째 언니랑 셋째 언니가 그렇게 귀남이를 미워했거든. 물론 나도 그랬지만, 언니들 속에 맺힌 응어리나 미움 정도를 어떻게 나랑 비교하겠어. 언니들에 비하면 새끼 손톱만큼도 안 될 걸.

분명 할머니가 떠안겨준 귀남이 그대로 안고 있지 말고 바닥에 던져버리라고 말하고 싶었을 거야. 나중에 둘째 언니한테 들었거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고. 큰언니가 못하면 자기가 뺏어서라도 애를 팽개쳤을 거라고.

그런데 큰언니가 우는 모습 보니까 말을 못하겠더라고. 우리 가족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귀남이가 미웠을 텐데... 애 안고 울면서도 그 애 어디 불편하면 어쩌나, 눈물 떨어지면 어쩌나 가려주는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아휴, 나는 우리 큰언니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 나한텐 엄마였지. 아버지나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그 여자한테 엄마라고 부르려고 했는데, 참 웃긴 게 나는 엄마랑 무슨 대단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말이 절대 안 나오는 거야.

언니들도 다 같은 심정이었는지 그 여자보고 아줌마라고 부르더라. 셋째 언니는 아줌마라는 호칭도 아깝다고 했는데 큰언니가 달래니까 할 말 없지, 뭐. 큰언니 말에 참다가도 결국엔 짐승만도 못한 년이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따지고 그랬거든.

어쨌거나, 나한텐 큰언니가 엄마였어. 내가 아줌마라고 부르던 그 여자는 우리한테 관심 없었거든. 넷째 언니가 말하기론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달래면서 꼭 하는 말이 그래도 우리를 자기 친딸처럼 보살피겠다고 했다더라? 그 여자는 귀남이 기저귀 필요할 때나 우리를 찾았지...

엄마라고 부르라는데 꼬박꼬박 아줌마 타령한다고 할머니가 노발대발해도 어쩔 거야, 할머니는 혼자고 우리는 일곱인데. 어려도 수로 밀어붙이면 어쩔 수 없는 거야. 한두 명이면 몰라도 일곱 명이나 되는 거 하나씩 쥐어박으면서 가르치기엔 너무 힘들잖아.

그러다가 언니들이 이 마을 떠나기 시작하는데, 너무 외로운 거야. 그나마 여섯째 언니는 공부해서 대학이라도 들어갔지, 첫째 언니는 조카 낳고 자살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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