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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의 끝자락

쉼표 다음 문장은 이어진다

by Susie 방글이





세 달 전, 나는 28년 만의 방학을 선언했다.

그 순간만 해도 이 시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알지 못했다.

그저 오랫동안 달려온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방학의 끝자락에 서 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3개월 동안

나는 글을 썼고, 길을 걸었고, 때로는 울컥했고, 또 한없이 웃기도 했다.

잊고 있던 나를 꺼내어 다독였고, 나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


머무는 동안, 곳곳에서 추억이 나를 불러냈다.

딸이 자라며 생활해 온 동네의 골목마다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고,

우리가 함께 웃고 울었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익숙했던 풍경이 달라져 놀란 적도 많았지만,

그 변화는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흘렀다는 증거다.

딸이 어릴 때 자주 가던 그 마트는 그대로인데, 달라진 건 가격뿐이다. 한때 묶음이 990원이던 과자들이 이제는 3,500원을 달고 있다.

20년 만에 다시 만난 인연들과도 함께 산을 올랐다. 한때 주말이면 같이 산행하며 웃고 떠들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땀 흘리며 오르는 길, 그들의 익숙한 웃음과 발걸음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따뜻한 다리 같았다.

도시를 지나,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
숲 속 작은 다리, 마음까지 잔잔해지는 시간.
숲길 따라 걷다 보면 마음도 한 걸음 느려진다.
푸른 하늘 아래 있는 바위에 새겨진 윤동주 시인의 시 - 서시
산행뒤에 마주하는 풍경 한 모금

방학은 학교처럼 숙제를 내지 않았다.

대신 "잘 쉬어라, 네가 네 삶의 주인이라는 걸 잊지 마라." 하고 속삭여주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이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


쉼은 멈춤이 아니었다.

쉬어가는 동안에도 나는 자라고 있었고,

멈춘 듯 보이지만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쉼표가 문장을 끊지 않듯,

이 방학 역시 내 삶의 문장을 이어주는 호흡 같은 것이었다.


방학은 끝났지만, 마침표는 찍지 않는다.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도 작은 쉼표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려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며 나와 함께 걸어준 당신에게도,

작은 쉼표 하나가 찾아가기를 바란다.


수고했어, 나.

고마워, 당신.


세 달의 방학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미국의 집은 아마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며칠이 멀다 하고 뽑아야 했던 그 잡초들이, 3개월의 자유를 누리며 내 키보다 더 크게 자랐을지도 모른다.


세상 무엇보다 강인한 그 잡초들은 생명력의 상징처럼 당당히 서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 허리가 뻐근하지만, 그 또한 달콤한 쉼의 댓가라 여기기로 한다.


삽을 들고 땀을 흘리며 잡초를 뽑는 그 순간,

나는 또다시 '일상'이라는 이름의 여행길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여정이 여기서 마무리된다 해도,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곧 미국으로 돌아가,

또 다른 쉼표를 이어갈 새로운 연재로 찾아올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걷는 성문 아래에서 내일을 향해 간다.


다음 연재 예고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


삶은 늘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간다.

역마살을 타고난 남편과 딸,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나.


다음 연재에서는 그 길 위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고 단단해진 나의 이야기를 담아낼 것이다.

이 순간, 모든 여정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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