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조금 엄살도 부려도 돼
나는 늘 서두르는 사람이다. 아침에 눈을 뜨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하루의 다음 장면으로 달려가 있고, 집 밖으로 나서면 어김없이 속도가 붙는다.
서두름은 어느새 성격이 아니라 습관이 되었고, 습관을 넘어 일종의 생존 방식이 되었다. 멈추면 안 될 것 같고, 멈추면 무언가 금이 갈 것만 같은 이상한 긴장감 속에서, 나는 그 속도 위에 오래 서 있었다.
그런 나에게도 하루 중 꼭 멈춰야 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빼꼼이와의 산책이다. 바쁜 날이면 솔직히 산책은 마음속 리스트에서 제일 끝으로 밀려나 있지만, 리시줄을 들고 현관문 앞에 서면 '오늘은 좀만 빨리 다녀오자'라는 혼자만의 다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 다짐을 이해해 주는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고, 특히 빼꼼이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문을 나서는 순간, 이미 마음은 벌써 다음 할 일에 가 있다. 하지만 빼꼼이는 전혀 다른 시간 속에서 산다. 나무 아래에서 냄새를 맡는 데 시간이 걸리고, 어제 지나쳤던 자리를 오늘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바람 한 줄이 네 다리에 스치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세상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처음에는 그 느긋함이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 그 멈춤 속에 내가 함께 얹혀 있다는 것을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빼꼼이가 멈추면, 나도 멈출 수밖에 없다. 억지로라도. 그 순간, 잠깐의 정지 속에서 묘하게 들리는 바람의 결, 나무들이 흔들리는 미세한 그림자, 흩어지는 먼 소리들. 일상 속에서 거의 잃어버렸던 감각들이 천천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빼꼼이는 내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멈추고, 나는 이유가 있어야만 멈추는 사람이다. 그 차이가 어쩐지 부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단순한 멈춤이 내 삶에 작은 틈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우게 된 것이다.
오늘은 그 틈에 새로운 멈춤이 하나 더 들어왔다.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녀오는 길, 차에서 짐을 옮기느라 바삐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추운 날씨 속에서 내 동작은 더 서둘러 보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건지, 근처에서 짐을 정리하던 기사님이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미소진 얼굴로 그분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It’s okay to take it slow. Life doesn’t always have to move fast."
("천천히 해도 돼요. 인생은 때론 천천히 가도 돼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I know… but I have a habit of rushing."
("알아요… 그런데 저는 늘 서두르는 습관이 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You know what rushing is?
Rushing is preference.
You choose to rush, but you don’t have to."
("서두른다는 게 뭔지 알아요? 그건 단지 '선호'예요. 당신이 서두르기로 선택할 뿐, 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리만큼 오래 여운으로 남았다. 낯선 사람이 건넨 말인데도, 이상하게 기댈 수 있을 만큼 따뜻했다. 이렇게 조용히 부담스럽지 않게 말을 건네는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얼마나 많은 서두르는 사람들을 지나쳐보며 이런 문장을 마음속에 쌓아왔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누가 나를 재촉한 적도 없는데, 나는 늘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마치 목적지도 없이 뛰어가면서도 '늦으면 안 된다'라고 중얼거리는 사람처럼. '서두름이 습관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말', 그 문장이 내 오래된 속도를 새삼스럽게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빼꼼이의 작은 멈춤과, 오늘 만난 낯선 사람의 조용한 충고. 두 가지 멈춤 사이에서 나는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왜 그렇게 늘 서두를까. 정말 시간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빨리 살아야만 한다'는 오래된 신념에 갇혀 있었던 걸까.
정답은 아직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누군가는 이유 없이 멈추고, 누군가는 이유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나는 그 틈에서 비로소 내 속도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멈추는 순간이 올까. 그날이 오면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선택해서 멈춰본다."
그리고 그 멈춤이 조금은 나를 다르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아마 아주 조금, 내 마음의 속도가 지금보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멈춘다는 것은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흘러가는 방향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주 잠깐의 정지 속에서도, 인생은 조용히 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연재는 잠시 쉼표 앞에 선다.
다음 문장을 준비하는 고요한 숨처럼.
브런치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저 마음속 생각을 적고 싶었다.
글을 쓰며 나를 돌아보고, 때로는 스스로 위로받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글쓰기가 '과제'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내가 처음 품었던 의도와는 조금 멀어진 모습일 것이다.
나는 글과 오래가고 싶다. 급하게 쓰기보다 오래 머물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잠시 멈춘다. 쓰지 않기 위한 멈춤이 아니라 더 오래 쓰기 위한 멈춤이다.
언젠가, 새로운 속도와 새로운 풍경을 품은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의 반복’ Vol.2로 다시 불쑥 인사드릴 그날을 약속드리며.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잠시 멈춘 다리 위, 마음속 작은 약속을 걸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