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밖에 몰랐다
기다림이라는 건
언제나 나의 최선이였다.
나는 네 잎클로버를 잘 찾았다. 세 잎클로버들 속에 숨어 있는 네 잎클로버는 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고, 네 잎클로버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얘기를 들은 뒤에는 네 잎클로버를 따며 소원을 빌었다. 네 잎클로버를 찾은 날에는 그날그날 다른 소원을 빌었지만 공통점을 말하자면 내 모든 소원은 늘 똑같았던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이었다.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뜻은 내 주된 소원이었다. 대만으로 수학여행을 가 천등에 소원을 적을 때에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썼을 정도로 나는 행복이라는 것을 찾곤 했다.
사소하게나마 내가 사회에 잘 섞여든 날이 행복해지는 날인지, 내 꿈을 이루게 되는 날이 행복한 날인지 나도 잘 모를 정도였으니까.
반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다,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 어렸을 때는 매일 잠들기 전, 같은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하지만 같은 반 친구가 "너 이름이 뭐였지?"라고 나를 보며 말한 뒤로 나는 혼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학교 안에는 큰 목소리와 사교성을 가진 아이들만 살아남았고, 그 전쟁 속에서 옅어지는 존재는 나 같은 아이들이었다.
그 옅은 존재감을 안고 계속 학교를 올라간 나는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한 채 학창 시절을 보냈고, 내가 그들을 구분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말하지 않는 아이, 말하는 아이.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던 건지, 수련회 때 선생님께서 "친한 친구들이랑 함께 있을 거니, 아니면 같은 반 친구들이랑 조금이라도 더 친해져 볼래?"라는 선택지 중에서 난 "같은 반 친구들이랑 함께 있는다."라는 선택을 했다. 그 안에서 딱히 즐겁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도 그냥 기다렸다.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거나, 내가 먼저 말을 하거나였지만 난 기다리는 걸 더 잘했으니깐.
세 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세 잎 클로버들을 헤집고, 밟아 버린다. 행운만을 바라보며 정작 제 곁에 있는 행복은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언뜻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기다림이 내 최선의 선택일까.
조금만 내가 손을 뻗으면 나도 말하는 아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기다림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행운을 찾기 위해 행복을 밟는다"
이 말은 네 잎클로버 (행운)를 찾기 위해 세 잎클로버 (행복)를 밟고 다닌다는 의미로, "행운"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행복"을 소홀히 하거나 잊어버리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