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밤하늘의 별을 따서 너에게
혜경을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동석의 눈빛이 얼음창고 마냥 냉랭해진다.
그 눈빛 속에 혜경은 지난 시간이 불현듯 떠오르며 왠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친다.
동석 때문만은 아니리라.. 무서워서 도망치지 못했다지만, 사실은 속상하게 하기 싫어서 도망치지 못했던
아빠.. 아빠가 서럽게 느껴져서 일 것이다.
10여 년 전, 혜경이 14살이 되던 해
"아빠는 오늘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은 안 믿는 자는 지옥에 가게 되니, 오늘부터 저녁마다 성경공부를 시작할 테니까 아빠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
그렇게 시작한 성경공부는 하루에 홀딱 2시간을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집에 가기 싫은데...'
학교스쿨버스 정거장에 내린 혜경의 발걸음이 틱틱.. 친구들이 보기에는 이유 없는 짜증이 나있다.
틱틱.. 조그만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갈 곳도 없는데 집은 벌써 3번이나 지나친다.
틱틱..
한걸음에 달려가던 우리 집이
이제 편안한 공간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기 전엔 일요일마다 가족끼리 산으로 바다로 여기저기 많이 다녔었다.
등산 가기 싫어하는 혜경을
아빠가 업고 내려오기도 하고
낚시 좋아하는 아빠 뒤에서 툴툴대며
기다리던 지루했던 시간마저도 그리운 시절이 되었다.
교회에 다니고 나서는 수요일, 일요일은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당연한 날이고, 빠진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는
새로운 법칙이 혜경의 집안에 자리 잡았다.
'이제 곧 방학인데.. 제발 방학이 오지 않았으면. 제발...'
다른 아이들은 빨리 방학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련만, 혜경은 방학이 다가올수록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린다.
이번 여름에는 공주 수련원에서 2주 동안 여름방학성경수련회를 한다.
전국의 사이비 교회 신도들의 자녀들이 한 곳에 모여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도록 예배말씀을 듣고
그룹교제라며 사생활 간증을 듣는다.
아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2주 동안
혜경은 살아남아야 했다.
입만 열면 하나님 외치는 아이들과 어울려야 했고,
그 속에서 외톨이가 되는 건 너무 무서워서
세상없던 친화력 마저 발굴해야 했다.
"하하.. 2주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있다 보면 우리 혜경이, 신실하게 변함 받겠지"
아빠의 뿌듯한 말소리가
새벽 알람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
한창 늦잠 잘 나이에 새벽 5시 반만 되면 기상벨이
울리고, 침낭을 정리하고 새벽체조를 하고
새벽말씀을 듣고 아침 먹고 다시 아침예배, 예배 끝나고 점심 먹고 다시 저녁예배, 저녁예배 끝나고 집단토의까지 마치면 밤 10시가 된다. 그리고 다시 새벽 5시 반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안전을 이유로 설치했다는 철문은
단단하기만 하다.
그 앞에 안전을 위해 있다는
사이비 형제자매님들은 냉혹하기만 하다.
공주에서 집까지, 돈 없고 길도 모르는 혜경은 멈춰버린 이 건물 속의 시간이 제발 속절없이 흐르기만을 바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미성년자일 뿐이다.
순종적인 바보, 무기력한 바보
방학 때마다 돌아오는 수련회 공포에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날마다 일기를 쓰고 날마다 날짜를 셀수록 시간이 더 안 가니 날짜를 바꾸어서 세기도 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또 했다. 밥 먹을 때 나오는 숟가락을 목구멍에 쑤셔 넣어버릴까도 했다.
죽지 못해 산다고 생각했다.
20살만 넘으면, 나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만 있으면
그때는 집을 떠나서 살아야지 다짐하고
또 해보기도 했다.
수련회는 점점 일탈의 작당모임으로 변하기도 했다.
여기도 끌려온 아이들이 제정신으로 버틸 수가 있겠는가. 온갖 못된 짓 비행청소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스트레스가 용암처럼 폭발하는 아이들은 여기에서 더 나쁜 작당모임으로 변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고통스러운 곳에
보낸 것이 부모님인데,
또 그런 부모님이 보고 싶어 진다는 것이 바보 같으면서도 멍청하면서도 돌아가고 싶은 곳은 우리 집이었다.
혜경의 엄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아빠 무서워 억지로 맞춰주는 듯하더니
결국에 혜경의 엄마도 아빠못지않은 신도가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혜경에게 이런 말도 했다.
"너는 보통 사탄이 역사하는 게 아닌가 보다. 이렇게 오랜 시간 교회에 다니는데도 변화가 없어."
"넌 아직도 하나님을 섬길 준비가 안 돼있어, 하나님보다 니 시간 니 삶이 중요한 거 같아.
아직도 그렇게 정신이 없니?"
"이 세상은 다 허상이야, 죽음 후에 천국의 상급을 쌓는 삶을 살아야지.. 세 상것들에 관심 갖지 말고..!"
그들 말마따나 나처럼 절대 안 듣겠다 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찬송가에 맞춰 미친 듯 춤을 추고 있기도 하고
여기가 싫어 도망치고 싶다던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어느 순간 무전전도여행을 떠나겠다며 자신의 간증을 발표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잡초밭은 잡초가 자라듯,
무럭무럭 세뇌도 자라났다.
*무전전도여행: 아무런 돈이나 금전적인 도구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만 전도하며 여행하다 돌아오는 것
예를 들어, 버스정류장에 앉아 '버스비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 버스기사님이 무료로 태우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버스가 오면 무작정 탄다거나,
무모한 히치하이킹을 한다거나
전혀 연고도 없는 사람들에게
하룻밤만 재워달라 한다거나 하는..
말 그대로 돈 없이 전도만 하는 여행
그래, 혜경도 차라리 교회에 미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차피 이 공간 이 시간 안에 갇혀있어야 한다면,
저 사람들처럼 자기가 좋아서 갇혀있다면
지금과 같은 고통을 끝낼 수도 있지 않은가!
차라리 미쳐버리자..!
열심히 메모하고 듣고 또 듣고 간절히
미치게 해 달라 기도하고 또 하고
눈물로 노력해 봤다. 그런데도 혜경은 그 교리에 그 이야기들에 미쳐 자신의 삶을 버릴 준비가 안된다.
다닐수록 혜경은 그 안에서도 나쁜 사람이 되었다.
그 교회 안에서도 어울리지 못하는 자..........
그들 말로 세상 속에서도 이상한 교회 다니는 사람.........
이쪽에도 저쪽에도 소속될 수 없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은 늘 갈기갈기 찢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