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화된 노블레스 오블리주
“내가 세금을 더 내는데, 왜 없는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갑니까?”
얼마 전, 한 경제 유튜버의 목소리가 오래 남았습니다. 그는 민생지원금 정책에서 상위 10%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자신이 땀 흘려 번 돈이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그 질문에는 ‘형평성’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성취를 중시하는 시대라면, 그의 불만은 단순한 불평으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오래된 한 장의 문서를 떠올렸습니다. 자매문기(自賣文記). 조선 후기, 가난에 짓눌린 이들이 스스로 자신이나 가족을 노비로 팔기 위해 작성했던 기록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손바닥 자국을 찍어 서명을 대신했습니다. 그 한 장의 문서에는, 인간이 자유를 버리고 생존을 택해야 했던 서늘한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비를 마련하지 못해 몸값을 내어놓은 사람, 노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아들과 함께 신분을 내던진 사람. 그들이 받은 돈은 오늘날 몇 백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대가로 후손까지 대대로 노비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회 안전망이 부재했던 그 시대, 가난은 곧 자유의 상실이었습니다. 자매문기는 그 사실을 가장 날카롭게 증언하는 기록입니다.
다시 유튜버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세금을 더 내는데, 왜 혜택은 다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가.” 이 물음은 한편으로는 정당합니다.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은 기여에 비해 혜택이 적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노력과 성취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불만입니다.
하지만 자매문기가 말해주듯, 사회 안전망이 무너진 자리에는 형평성의 논란보다 더 깊은 절망이 남습니다.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고, 선택할 권리마저 사라집니다. 복지 제도는 바로 이런 절망을 막기 위해 우리 사회가 세운 최소한의 약속입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날의 제도화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부르고 싶습니다. 과거에는 부유층의 선행이 사회적 책임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특정인의 양심만으로 공동체를 지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금을 통해 그 책임을 제도화했습니다. 모두가 조금씩 기여해, 누구도 존엄을 잃지 않도록 지켜내는 울타리를 세운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세금과 복지를 둘러싼 불만과 요구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복지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 진짜 중요한 물음이 있는지.
“오늘 우리의 사회 안전망은, 자매문기의 비극을 막을 만큼 충분히 튼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