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울다가 웃었다.
가을 운동회. 6학년 단체율동은 부채춤.
그래서 운동회 날 맞추어 햇볕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연습에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어.
난 사실 그 부채춤이 너무 어렵고 싫었는데 전체 6학년이 다해야 하는 이벤트였으므로 가타부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그렇게 힘겹게 연습을 마치고 드디어 "짠" 오픈공개를 하는 운동회 날 당일 아침.
당연히 필요한 준비물이 있었겠지??
영자 씨는 전날 저녁에 몇 번이나 빠진 준비물이 없는지 미리 잘 확인하라고 주의를 주셨는데...
아침에 준비하고 나서려고 보니 흰 장갑이 없는 거야.
한복은 각자 자기 것을 입었지만 장갑은 하얀색으로 통일해서 껴줘야 했거든.
근데 '아뿔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
그래서 내가 장갑이 필요하다고 했는지..., 돈을 달라고 했는지...
그 말에 영자 씨는 불끈 화가 나셨어.
운동회에 함께 가는 *옆집, 앞집 동네분들과 같이 먹을 음식을 한참 준비 중이던 영자 씨는 지나치게 화를 내시며 '지각하겠다, 아침에서야 이런다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듯' 당신 맘에 안 드는 나를 마구 혼내셨어.
또 가만있을 내가 아니어서...
'아빠 때문에 화가 난걸 왜 나한테 분풀이냐'고 '가는 길에 그냥 사면되는데 뭐가 문제냐'고 바득바득 한마디도 안 지고 대들다가 드디어...
1년에 1-2번은 하는 공포의 뜀박질, <동네 한 바퀴>가 시작되었잖아.
영자 씨는 손에 잡고 있던 커다란 주걱을 들고 나를 잡으로 오셨고, 나는 그런 영자 씨를 피해 앞만 보고 도망가고... 동네를 한 바퀴가 아니라 몇 바퀴씩 뺑뺑뺑 ~
먼저 지친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대문 앞에서 훌쩍이고 있는데 우리 옆집에 새들어 살고 있던
**민희이모가 내 가방을 챙겨 나오셨지.
장갑사라며 돈도 쥐어주셨어. 그걸 받아 들고 냅다 학교로 울면서 줄행랑... ㅎㅎ
그 '헉헉' 열정의 동네 몇 바퀴를 끝내고 울다 말다 학교에 도착하면... 다행히 다 잊어버렸어.
가는 도중에 친구들 만나고, 학교 도착해서 주의사항 듣고, 운동장에서 리허설하고...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있다 보면 동네사람들과 반아이들 부모님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각 학년은 청팀과 백팀으로 나뉘어서 3-4주쯤 열심히 열씨미 - 연습했던 경기와 단체율동을 나름 치열한 응원 속에서 선보였지.
영자 씨도 '내가 언제 내 딸을 울렸을까'싶게 목청껏 응원하고.
민희 이모가 찍어준 부채춤 사진도 어디 있는데... 본가 가는 날 바랜 내 앨범에서 찾아봐야겠다.
기억이 가물하네...
영자 씨, 찾아서 여기 한 장 올려볼까~ ㅎㅎ
그러다 보면 돌아오는 운동회 점심시간. 운동회에 빠질 수 없는 그것, 먹거리.
집집마다 특색 있게 싸 온 도시락들이, 종류는 같아도 또 묘하게 달랐어.
예를 들면 김밥도 말이야 어느 집은 단무지를 빼고 무 말랭이를 넣고, 어느 집은 시금치 대신 오이를 넣고...
그래서 모여 앉아 나눠 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무 말랭이랑 계란만 넣은 김밥을 맛본건 내 생전 그때가 처음이었어.
영란이네 김밥이었지, 아마? 우리 옆집에 살던 나하고 동갑이던, 동생이 밑으로 셋이나 있던 여자아이 말이야.
와, 신기하다. 13살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아이 이름이 생각나다니...
나는 그 당시 고가였던 바나나도, 바나나우유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영자 씨는 "바나나는 못 사도" 하면서 바나나우유는 꼭 챙겨 오셨잖아.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데... 심지어 영자 씨도 밍밍하다며 잘 안 드셨던 그 바나나우유.
우리 식구는 우유를 다 안 좋아했으니까. 막내만 빼고.
왜 매번 준비해 오셨는지 이유를, 지금까지 난 모르네. 왜 그랬어, 영자 씨?
이대로 풀 수 없는 미스터리가 되는 건가? 이런;;
그리고 운동회 먹거리의 하이라이트.
그날을 위해 특별히 준비되는 내 선물, 그건 바로~~ 통조림 파인애플~
귀한 파인애플 통조림이었어. 운동회 날은 꼭 가져오셨는데...
선생님 것도 잊지 않으시고...
생각나서 오늘 마트 간 김에 한 번 사봤어. 델몬트 파인애플 통조림.
그때도 이거랑 똑같은 제품이었나? 델몬트?
그랬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네~
조심스럽게 캔 뚜껑을 들어 올려서, 국물은 좀 따라 버리고...
어려서는 국물도 홀짝홀짝 다 마셨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래도 캔 국물은 버리게 되네.
접시에 담았어. "음~ 맛있다!"
사실 요새는 생파인애플도 껍질 싹 벗겨 먹기 좋게 포장해서 나오기 때문에 통조림을 먹을 일이 아예 없어.
생파인애플은 신선하면서 너무나 달고 맛있거든.
그래도... 오늘은 가을 운동회를 양념 친 탓인지 통조림이 더 맛있는 것 같아. 맛있어~ 영자 씨!
13살, 부채춤을 추던 그 운동회날엔 이런 때가 올 줄은 정말이지 몰랐는데...
나 혼자 통조림 따먹으며, 영자 씨 외치는 날!
같이 먹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국민(초등) 학교 시절 운동회는 그 자체로 가을의 상징이었습니다.
운동장엔 낙엽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많이 흩날렸고, 돗자리 위에서 나눠 먹던 김밥과 미지근한 바나나우유, 김 빠진 사이다는 그 어떤 외식보다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제겐 특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까지~
영자 씨,
그 귀하고 달콤한 파인애플을 주셨으니, 가끔 나한테 화풀이한 거 용서해 드릴게요.
뉘 집 딸이 이렇게 제 멋대로냐고요? 저 말씀인가요? ㅎ
영자 씨 큰 딸 아닙니까? 정웅 씨를 반만 쏙 닮은... ㅎㅎ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 당시 동네 초등학생은 모두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므로, 동네분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서로 음식도 나눠먹고 운동회도 같이 보고 응원도 하고 그랬다.
**특별히 정가고 맘에 드는 여자어른을 지금처럼 그때도 우린 이모라고 불렀나 보다. 물론 그분은 영자 씨의 친동생이 아니니, 나의 친이모도 아니다.
*** 그날 아침 동네 한 바퀴의 해프닝을 선물한 건 머리에 쓴 저 족두리였나?
GPT가 다듬어준 빛바랜 옛 사진. 지브리풍 사진 속 우리는 모두 눈을 감고 있다.
햇빛이 너무 찬란해서 찡그린 눈이 이아이에겐 그리 보였나 보다. 너무하네, 저렇게 그려주다니...
그래도 추억 한 스푼, 웃음 두 스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