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 씨는 그날도 반짝였다.

예고 없는 7명의 손님

by 토닥토닥 oz

영자 씨!

지난번에 쓴 글을 읽고 있자니 문뜩 5학년 때의 한순간이 생각났어.

우리가 서울로 이사 와서 처음 새집을 장만하고 U동에서 G동으로 이사했을 때...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쭉 살았었잖아.


단독주택, 앞마당과 작은 정원- 아니다 그냥 꽃밭, 이 있는 그 집.

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서울 우리 첫 집.

그 집에 살 때 우리 집에서 한참 더 높이 올라가면 달동네가 있었잖아.

그땐 지금처럼 아파트를 끼고 초등학교가 따박따박 붙어 있을 때가 아니어서 그 모든 아이들, 달동네 사는 아이들, 중간동네 나. 아랫동네 아이들, 학교 근처 동네 아이들, 모두 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M초등학교.


그래서 오는 길에 학교 근처 아이들과 헤어지고, 아랫동네 아이들과 헤어지고, 내가 떠나면, 남은 아이들은 그 달동네까지 한참을 더 올라가고 했던 거 같아.


어느 날 그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오겠다고 떼를 써서 할 수 없이 7명인가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오게 되었는데 영자 씨가 말도 안 하고 함께 온 반친구들을 너무 다정히 맞아주었어.

"그래, 우리 딸 친구들이구나." 하면서...


그때 엄마도 틈틈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여서, 엄마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왔던 난 사실 엄마를 보고 좀 당황했었거든.

미리 말씀도 드리지 않고 우르르 온 거였으니까.

그리고 그날이 동네 반장집 대학생 언니하고 공부하는 날이었고.

그니까 과외하는 날 애들을 끌고 왔으니 혼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엄마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겨주시더니 맛있는 감자랑 호박이랑 고구마를 잔뜩 쪄서 사탕과 함께 내주셨지. 예상치 못한 엄마 반응에 난 놀랐지만 내 친구들은 그 이상의 감동을 먹었어.

학교 끝나고 집까지 걸어 돌아오는 그 시간은 꽤 길고 마침 배가 고플 때라서, 그 찐 감자랑을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난 감자 하나만 먹고 뺏길새라 사탕만 얼른 3-4개 챙긴 기억이 있어.

그리고 수박이랑 사이다로 만든 수박화채를 해주셨는데 그게 또 그렇게 맛있다며 애들이 수박씨마저 호로록 다 마셔버렸었잖아. ㅎㅎ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는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했었는데 체격도 작지 않았던 영자 씨가 그 놀이를 너무나 잘해서 친구들이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레지고...


그날 이후 나는 학교에서 인기가 90%쯤 상승, 2학기땐 회장선거에서 기권을 했음에도 친구들이 거센 반항을 해서 난감할 정도였어.

담임선생님도 "뚜껑은 열어봐야 알지" 하시면서 그냥 도전해 보라 하시고...

하지만 그대로 나갔다면 나 회장 먹었을 거야. 하하...


엄마 덕분이었어. 엄마가 속상해질까... 선거 얘긴 하지 않았지만.

그냥 난 분단장이 나한테 꼭 맞는 내일 같았어.

마음도 편하고 즐거웠어. 그걸로 만족했어. 참말이야.


영자 씨는 내가 임원을 못해서가 아니라 당신 때문에 안 하는 걸까 봐 맘 아파했을 거야.

알았다면 말이야. 그렇지?




그날 생각이 나서 냉장고를 뒤져보니 감자도 고구마도 없고 냉동 단호박이 냉동실에 있더라.

요즘은 다 손질하고 껍질까지 벗겨서 냉동식품으로 만들어 팔거든.

쿠팡에서 그전날 12시까지만 주문하면 다음날 새벽에 배달이 돼. 진짜 세상 참 좋아졌지~


아니구나. 영자 씨가 살던 10년 전에도 쿠팡 새벽 배송은 있었던 것 같아.

옛날 얘기다 하면 자꾸 '그땐 그랬지.'가 돼버리니... 난감하네~


어때? 한 번 쪄봤어. 망고 잘라놓은 것처럼도 보인다. 맛있어 보여?


용기에-담긴-찐-호박.jpg
단호박-찜.jpg
단호박 찜

다이어트 식품이긴 한데 너무 많이 먹어서 그것이 문제...

나 영자 씨처럼 둥실둥실해지면 안 되니까. 울 영자 씨 그거 제일 싫어하니까.

하지만 이미 난? 노코멘트. ㅎㅎ

그래도 다이어트 성공해서 작년부터는 보기 좋은 정도로는 유지하고 있어.

아직도 여전히 날씬은 아니지만... 영자 씨 닮은 거잖아~ 책임지셔~


이렇게 말하면 살짝 눈을 흘기시던 영자 씨 얼굴이... 떠.오.른.다.

나이 들면서 더 사랑스러워지고 애교스러워지던 우리 영자 씨!

"영자 씨~" 하면 엄마를 친구 삼는다며 기분 나쁜 척하시면서도 활짝 웃으시던 영자 씨!

다시 한번 "영자 씨, 영자 씨" 부르며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놀려주고 싶다.

10년 동안 못해 본 일인데, 새삼 오늘은 왜 이리 간절해질까?




영자 씨,

요즘은 파파를 "정웅 씨, 정웅 씨" 부르고 있어요. 파파도 예전에 당신처럼 그냥 어이없다는 듯 껄껄 웃으십니다. 첨엔 어색해하시더니 지금은 완전히 적응하셔서. "정웅 씨" 부르면 "어?" 하거나 "왜?" 하세요.


영자 씨는 정웅 씨가 그립지는 않죠?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