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호흡과 헬스장 오니.

트레이너가 겪은 황당하고도, 웃픈 이야기.

by 정책임

하루에만 200명의 사람들을 보는 트레이너.

8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보는 트레이너가 기억하는 가장 황당한 일들은 무엇일까?

오늘은 8년간 내가 겪었던 상황 중 기억나는 일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많은 재밌는 일들이 있었지만, 이 글을 적는 시점에서 기억나는 몇 가지 사건 위주로 글을 적어보려 한다.


1. 안개의 호흡.

요새 유행하는 '귀멸의 칼날'을 본 적은 없지만, 유튜브로 내적 친밀감이 상당히 쌓여있는 상태다.

제목은, 주인공들의 특성에 맞춰 'oo호흡'이라는 필살기들을 쓰는 것 같길래, 아는 척해봤다.

나에게도 기억나는 안개의 호흡 사용자가 있다.


바야흐로 2019년.

근무하던 헬스장은 구도심지였다. 낮고 높은 여러 모양의 건물들이 따닥따닥 붙어있고

여러 음식과 옷가게 특유의 향들이 즐비한 거리였다. 광주에 살아봤던 사람들은 충장로라 하면 알 것이다.


어느 날 헬스장 옆건물의 방탈출 카페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건물들이 서로 껴안듯, 붙어있던 형태였기에

옆 건물인 우리에게도 자욱한 연기와 코를 찌르는 타는 냄새들이 순식간에 번져왔다.


재빨리 관장님께 상황을 알리고, 안에서 운동하고 있는 회원님들께 소리치며

불이 났으니 1층으로 다들 대피하라 알렸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대피시킨 뒤, 화장실과 탈의실에 남은 사람들이 없는 걸

확인한 내가 탈출하려는 찰나였다. 안개(연기) 속에서, 봉이 혼자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잘못 보았나 싶어, 허리를 낮추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정말로 봉이 움직이고 있었다.

봉 밑에서 벤치 프레스를 하고 있는, 우리 회원님과 함께.


빨리 나가야 한다는 내 말에,

"쉬는 시간 없이 2세트만 빨리 하고 나가면 안 될까요?"

라는 명언을 쏟아내시며, 나와 협상을 하시던 회원님..

전 세계 헬창들은 반성하자. 나는 그날 진짜 무산소 운동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목격했다.


보이지도 않는 안개(연기) 속에서, 땀과 눈물에 젖은 근육질의 두 성인 남자가

걷히지도 않는 안개를 휘적거리며(분명히 얘기하지만 연기다), 서로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이게 청춘영화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나는 이따금씩 연기냄새를 맡을 때마다, 그날 그 남자를 잊지 못한다.

잘 지내고는 있을까.. 지금쯤 3대는 얼마나 드실까...


60kg의 쇠봉을, 안갯속에서 휘적거리던 그가,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안개의 호흡 자다.


P.S.

그 회원님들 끌고 나간 뒤, 다른 회원님들도 1 set만 더하고 나올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비정상인줄 알았다.




2. 물흘림 실험.

여러분은 물흘림 실험을 알고 있는가?

타일이나 방수 공사가 끝나면, 양동이로 물을 부어 배수구 쪽으로 물이 잘 흘러가는지 하는 시험이다.


당연, 정상적인 시공이라면

경사를 따라 물이 배수구 쪽으로 잘 빨려 들어간다.

나는 어느 날 타의적으로, 우리 헬스장이 시공이 잘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19년도 근무했던 헬스장은 매일 개인운동을 마친 뒤, 샤워실을 청소했다.

어차피 나도 씻으면서, 같이 샤워실도 닦으면

따로 시간을 내서 청소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어느 날 나는 만족할만한 하체운동을 끝마친 뒤였다.

배가 고팠지만, 씻고 나온 상태의 개운한 상태로 밥을 먹고 싶었다.

그리고 샤워실을 들어간 나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물론 하체운동 때문은 아니다.


프라이빗하게 개인 칸막이로 되어있는, 세련된 우리 헬스장 샤워장에

누군가의 변이 떠있었다.

배수로가 막혀있는지, 물이 고여있는 상태로.


다른 선생님이 아니라 내가 먼저 봐버린 게 억울한 순간이었다.

꼼짝없이 먼저 발견한 내가 치워야 할 상황이었다.

웃긴 건 좋은 샴푸를 같이 썼는지, 변냄새보다는 향기로운 향만 났다.


제일 먼저, 배수로를 해결했다.

그리고 내 물흘림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변은, 헬스장의 완벽한 경사를 이기지 못하고 배수로로 빨려 들어갔다.

p.s 물론 배수로로 들어가기 전 건져서 따로 버렸다.



3. 헬스장에는 도둑이 없다.

물론 어디 헬스장에는 분실사건이 분명 일어났을 것이다.

내가 지금껏 근무했던 헬스장은 우산을 바꿔 가져가는 일 이외에는 도난사건이 없었다.

그런데 도난 사건이 일어난다. 이게 무슨 말일까?


헬스장을 사용하다 보면 개인 락커가 어떤 것인지 알 것이다.

일정료의 사용료를 내고 네모난 개인 락커를 배정받고,

계약 기간 동안 헬스장에 개인물품을 둘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 헬스장은 개인 자물쇠를 따로 지원해 드리고 있는데,

대부분의 회원님들이 자물쇠 풀기가 귀찮아서 안 잠그고 다니신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개인락커에 넣어 놓은 자신의 물건이 사라졌다는 회원님들이 생기신다.

트레이너 초창기 때에는 깜짝 놀라고,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컸다.

진짜 도난이면, 같은 헬스장의 회원님일 테고 다들 서로 알고 있던 사이이니 관계가 애매해질 것이니 말이다.


그러데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그 주변 락커들을 열어보면 된다.


자신의 락커인 줄 알고 주변 다른 락커에 놓아놓는 것이다.

물건이 사라졌다는 신고가 10번이 들어오면, 10번 다 이런 경우다.


자신은 100%자신의 락커에 넣었다는 회원님들은, 옆 락커에 자신의 물품이 들어있는걸 본 순간,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4. 경찰과 함께 사라지다.

진상이 없는 곳이 있을까? 무슨 사업을 하던, 진상은 늘 있기 마련이다.

나는 특히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난감하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마치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기분이다.

오늘은 헬스장에서 겪은 한 어르신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우리 헬스장은 은행 건물 안에 치과와 은행과 함께 있다.

주차장도 같이 쓰는데, 10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다.

그래서 손님들에게는 늘 “볼일이 끝나면 차를 바로 빼달라”고 강조한다.

늦게까지 운영하는 헬스장이 문 닫을 때쯤이면, 주차장은 비어 있어야 한다.


그날은 여름 제주 특유의 눅눅한 밤이었다.

문을 닫고 인테리어를 손보던 중, 창밖에 여전히 한 대가 남아 있는 차가 보였다.

확인해보니 우리 회원님의 차량이었다. 옆 아파트에 사시면서 아예 헬스장 주차장을 자기 집처럼 쓰는 듯했다. 매니저님 말로는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날씨는 덥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해야 할 일은 늦어졌다.

결국 평소 그 회원님과 친했던, 선생님께 부탁해 회원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술자리에 계셨다. 전화기 너머로 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회원이 여기 차 좀 댈 수도 있지, 뭘 이런 걸로 부르냐.”

잠시 후 술 냄새를 풍기며 어르신이 나타났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 있었고, 옆에 있던 친구분은 자신이 노무사라며 “큰일났다”는 식으로 겁을 줬다. 그런데 차를 빼주기는커녕 옆 칸으로만 옮기고 다시 내려와 화를 냈다. 나도 참지 못하고 말다툼을 하게 됐다.


그때 매니저님이 조용히 휴대폰을 들며 말했다.
“아, 경찰서죠? 여기 음주운전하신 분이 있어서 신고하려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경광등 불빛이 주차장을 비췄다. 경찰이 상황을 듣자 어르신들은

“몇 미터밖에 안 옮겼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단호했다.

“그게 바로 음주운전입니다.”

그 한마디에 주차장은 조용해졌다. 노무사라는 친구분이 법 조항을 읊었지만, 경찰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상황은 순식간에 끝났다.


나중에 다시 내려갔을 때, 어르신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부모님께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당신들 각오해, 이 동네에서 사업 못 하게 해주겠다”고까지 말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매니저님이 날 막으며 단호히 말했다.

“지금 협박하신 거죠?”

그 한마디에 그는 말이 막혔고, 나는 그제야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며칠 뒤 들은 소식으로는, 이번이 첫 음주운전이 아니었다고 했다. 결국 면허 정지와 함께 꽤 큰 벌금을 내셨다고 한다. 우리 헬스장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고, 오히려 그 어르신을 불편해하던 회원님들이 좋아하셨다.

사실 평소 행실도 좋지 않으신, 어르신이였다.


헬스장 회원님을 상대로, 거기다 나이도 훨씬 많으신 어르신에게 너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고 말하겠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세상에는 없는 게 나은 단골이 분명히 있다.


오늘 소개한 이야기 말고도 분명, 더 재밌고 황당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확신한다.

다만 그 모든걸 기억하지 못하는, 내 기억력이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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