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으로서의 죽음, 사랑으로서의 삶
고정순 작가는 주로 슬픔과 상처를 그림책을 통해 따뜻하면서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그림책이라고 하면 주로 밝고 따뜻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기 마련인데요. 그녀는 그림책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상실, 사회적 약자, 죽음, 동물권 등 쉽지 않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나갑니다. 거칠고 아슬아슬한 펜 선, 완성되지 않은 듯한 선 자국 등으로 등장인물의 불안, 위태로움과 같은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이번에 소개할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에서도 커다란 세상에 살고 있는 작은 존재가 소멸해 가는 모습을 다루며 존재의 연약함과 외로움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그림 속에 따뜻한 위로가 숨어 있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한때는 젊고 멋졌던 산양은 세월이 흐르며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하게 됩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어느 날, 지팡이를 자꾸만 놓치게 되면서 곧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산양은 ‘죽기 딱 좋은 곳’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젊은 시절 누볐던 너른 들판부터, 단숨에 오르내리던 높은 절벽까지. 더 이상 늙은 산양은 그곳에서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늘 목을 축이던 강을 찾아보지만, 그곳에 비친 자신의 늙고 초라한 모습을 보고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책에서 죽음은 두려워할 무언가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죽음을 예감한 산양은 죽기 딱 좋은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이리저리 헤매는 산양의 모습을 보며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죽음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책을 읽으며 나의 마지막을 상상해 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했던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게 찾아올 죽음을 떠올리다 보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 자신이 누볐던 장소를 찾아다니다 자신의 쇠약함을 인정하는 산양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많은 날들을 불평과 후회와 눈물과 웃음과 소소한 행복들로 채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들을 사랑했느냐?'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주어진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삶이 아름답고 행복할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어려울 때도, 심지어 끝이 보일 때도 사랑하고 싶습니다. 완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이었던 내 삶을 사랑하며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큰 수술을 받았던 엄마가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할머니를 보니까 먹을 수 있을 때 맛있는 것도 먹고, 다닐 수 있을 때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야 하더라. 요새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하루하루 늙어감을 체감하는 부모님, 부모님을 바라보며 언젠가 찾아올 이별의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코끝이 찡해집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힘을 주어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의 욕구보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 우선이었던 엄마가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늙은 산양 이야기를 보며 부모님과 나를 키워주셨던 사랑하는 할머니를 떠올리게 됩니다.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가 원하시던 마지막 모습으로 세상과 작별하실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집에 가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할머니의 얼굴이 자꾸 아른거립니다. 마음이 무거워 집니다.
‘나에게’로 시작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얼마나 충만한 삶을 살았는지를 깨닫는 늙은 산양. 산 위의 바람, 풀잎의 향기, 젊은 날 보냈던 빛나는 순간들은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 더욱 빛납니다.
오랜만에 편안한 잠자리에 든 산양처럼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낸 뒤에도 건강하게 슬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도 남겨진 이들이 나를 추억하며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을 그렇게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매일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