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편 5 : 아이와 아내의 두발서기

선물

by CㅇSMㅇS

밤과의 전쟁, 그 마지막 라운드

딸이 태어난 지 6개월, 우리는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바로 밤중 수유 끊기였다. 밤잠 패턴은 어느 정도 잡혔지만, 새벽에 한두 번 깨서 젖을 찾는 통에 통잠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영유아 검진 때 이제 밤중 수유를 끊으라는 의사의 권고도 있었다. 육아서에 적힌 '젖 냄새가 원인'이라는 문장에 우리는 특단의 조치를 결심했다.

며칠간 아내를 해방시켜주고, 나와 딸, 단둘이 자기로 한 것이다. 첫날밤, 딸은 어김없이 깼다. 하지만 나는 배고파 우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그저 잠결에 뒤척이는 울음. 나는 모른 척, 밥 대신 토닥임과 포옹으로 버텼다. 며칠간의 실랑이 끝에, 딸이 밤새 깨지 않고 자는 시간이 기적처럼 늘어났다. 마침내 '통잠'의 쾌거를 이루었다.

아내는 며칠 혼자 자니 개운하면서도 허전하다고 했다. 밤잠의 방해꾼이 없어 좋았지만, 한 몸처럼 붙어있던 작은 온기가 사라진 자리가 어색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통잠 성공 일주일 뒤, 우리는 다시 한 방에 모였다. 침대에는 우리 부부가, 바닥엔 딸의 침대를 놓았다. 세 식구가 한 공간에서 숨 쉬고 잠든다는 평화로움이 불안감을 압도했다.


딸, 두 발로 서다

통잠의 위력은 대단했다. 밤새 풀충전된 에너자이저가 된 딸은 온 집안을 제 세상인 양 누비고 다녔다. 그러던 206일째, 사건이 터졌다.

"어? 여보! 여보, 빨리 이리 와 봐!"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에 거실로 달려가 보니, 맙소사. 엊그제 겨우 뒤집던 녀석이 소파를 낑낑대며 붙잡고, 제 두 다리로 오들오들 떨며 서 있는 게 아닌가. 녀석의 얼굴에 번지는 그 뿌듯함과 '나 해냈어!'라고 외치는 듯한 환한 미소를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리 딸이 또 한 단계, 제 힘으로 세상을 향해 일어선 것이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뒤집고, 기고, 앉고, 마침내 서기까지. 반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인간의 진화 과정을 압축해서 보는 듯했다.


아내, 다시 세상에 서다

딸이 제 힘으로 세상에 설 준비를 하는 동안, 아내 역시 사회에 다시 설 준비를 시작했다. 복직이었다. 임신과 육아로 잊고 지낸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아내는 분주했다. 화장품을 사고, 몸에 맞는 옷을 골랐다. 그동안 모아둔 용돈을 쓰며 오랜만에 자신에게 투자하는 아내의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의 화룡점정이자, 엄마로서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는 의식이 남았다. 바로 8개월간 이어져 온 모유 수유, 그 대장정의 끝을 고하는 단유였다.

마지막 수유를 마친 날, 아내는 지난 251일간의 여정과 복잡한 심경을 일기에 남겼다.



미친듯한 복직준비중.화장품을 얼마나 사는건지. 용돈탕진중. 옷도 사고 살거 투성이. 다행히 지금까지 많이 모아놨지. 이 순간을 위하여. 임신기간동안 육아하는 동안 대강 대강 입고 있었다. 몸의 붓기도 빠지고 살도 슬슬 빠지고 단유도 하려고 준비하고 있고.

내일이면 아예 단유. 그날이 오긴 오는구나. 8개월동안 지금까지 수고 했다. 251일간의 대장정이 끝이 나는구나. 젖몸살이 살짝 왔는데 참을 만 했다. 미친듯한 극한의 고통은 아니었다. 극한의 고통은 진통이지. 진짜 개아픔. 사람 미치게 만드는 고통. 내일은 서은이도 안먹으니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아파서 분유를 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사랑하는 서은이. 엄마를 매우 좋아하는 서은이. 마지막 수유를 끝내놓고 나가려는데 서은이가 마지막을 알듯이 엄마와 오늘은 같이 자고 싶은지 자꾸 못가게 붙잡았다. 분명 많이 졸린데도 투정한번없이 엄마 배위에서 얼굴을 부비며 자고 엄마손을 꼭 잡고 자고 그런 널 내비두고 엄마가 나가려니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고, 난 그런 딸을 다시 안고 재운다. 엄마가 누우니 본인도 따라눕고 잔다. 엄마머리카락을 배고 한손엔 엄마머리카락을 꼭 잡고. 엄마 절대 가지마라고 말하는 거 같다. 새근새근 잘자네. 이렇게 이쁜데 소중한 딸. 같이 누워 옛생각에 잠기었다. 서은이를 처음 보게 된 그 날, 정신이 혼미한 순간에 슬쩍 정말 온힘다해 눈떠 보았던 그 새벽의 그날. 울면서 내 젖에 입을 맞추던 그날. 몸을 일으키고 드디어 딸과 상봉한 그날. 눈물을 꼭 참고 내 딸만 하염없이 유리창 건너에 있는 딸과 마주했다. 그리고 첫 수유콜을 받고 너가 나오길 기다린 날. 우물쭈물 내자식 혹여나 나로인해 다칠까 조심조심 다루던 그날. 첫 모유수유인데도 힘있게 잘 빨아주던 너. 처음부터 잘 먹어주어 고마워. 매우 사랑해. 이제 모유말고 분유먹어보자. 아빠가 자꾸 비싸다고 명작 먹이자고 했으나 엄마가 우격다짐으로 센서티브 먹이기로 했어.

너가 조금이나마 소화가 잘 되길 바래서. 넌 모유먹던 아이니까. 모유만큼은 아니지만 최대한 모유와 비슷하거나 좋다고 하는 걸 먹이고 싶어서.

서은아, 내일은 엄마가 너 자고 있는 걸 보다가 너가 눈뜨면 바로 엄마가

보일 수 있게 해볼게. 우리딸 매우매우매우 사랑해. 천만번 사랑해.

- 아내 육아일기에서 발췌


선물

나는 그 일기를 읽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딸에게 건넨 251일간의 모유는, 단순히 영양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내의 시간과 자유, 그리고 고통을 양분 삼아 길어 올린 생명의 정수 그 자체였다.

모유 수유의 끝은, 딸의 세상과 엄마의 세상이 처음으로 분리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딸의 성장을 위한 엄마의 선물이었고, 동시에 '엄마'라는 역할에 헌신했던 아내가 사회인으로, 한 명의 독립된 여성으로 다시 일어서기 위해 스스로에게 건네는 선물이기도 했다.

그렇게 딸과 아내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당당히 두 발로 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위대한 첫걸음들의 유일한 증인이자, 기록자였다.


일본어판 : 国内編5:娘と妻の、最初の一歩|COSMOS

중국어판 : 国内篇 3 :看世界的窗 - 这里有一个休了3年育儿假的爸爸 - 这里有一个休了3年育儿假的爸爸 | 豆瓣阅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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