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우연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이 마음속에 오래 남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누군가를 마주친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아니, 어쩌면
그런 우연에 기대고 싶었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상하지 못한 인연이 있다.
처음엔 그저 스쳐 갈 줄 알았던 사람이
어느새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있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내 기분을 먼저 알아차리던 사람.
내가 한창 힘들어할 때,
그는 내가 무언가 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멋진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내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그 따뜻한 시선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수년을 함께해도 알기 어려운 마음인데,
그는 나를 조용히,
그리고 깊이 이해해 주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고,
나도 모르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한동안 나는 그 선택을 부정했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로는 어떤 태도가 현명한지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 더 괴로웠다.
친구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무력감은
나를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그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단순히 친구를 잃은 것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받아 주던
안전한 공간을 잃은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떠올라
일부러 잠을 자거나 책을 읽고,
스릴 있는 영화에 몰입하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함께 웃고 걷던 장면들이 떠올랐고
나는 또 그 자리에 멈춰 서곤 했다.
시간이 흘렀고,
서서히 내가 좋아하던 일들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마음의 안정도 조금씩 돌아왔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마음이 회복되었기에
비로소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지금도 그 친구를 떠올리면
여전히 아프고, 그립다.
하지만 내가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아마도 그 친구가
나에게 바랐던 모습일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오래 이어지는 관계가 있고,
짧은 인연이지만 깊은 마음을 나누는 사람도 있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만남도 있다.
모든 만남이 인연일 필요는 없다.
우연이 반드시 의미가 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스쳐 간 그 순간 자체로
충분한 경우도 있으니까.
어쩌면 인연이란
길이나 깊이가 아니라,
서로를 스쳐 가는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마음을 내주었는가로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