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집념 16화

늦은

by 로지

몸이 건강하면 정신도 건강한 법.

그동안 생활이 엉겨 제대로 날 관리하지 못한 채 몹시 쇠약해졌다.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듯 단정한 생활패턴을 찾기로 했다.

우진 씨도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며 나와 꾸준한 애정을 나누었고 더 이상의 의심이나 다른 이의 방해로 우리를 잃고 싶지 않다.

우진 씨는 한참 여러 학회를 앞두고 있었지만 내가 걱정되어 참석하지 않고 가까이 있어주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여러 일탈들로 인해 작정하고 그에게 기대어 보기로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짐으로 안정된 사이를 인식하는 게 커다란 위로이자 든든한 울타리가 되긴 한다. 어른이라고 생각한 나 스스로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되어 보살핌을 받고 더 자라야 하나 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말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줄곧 붙어 지내던 어느 토요일.

우진 씨의 동창회가 있어서 늦은 한밤중의 데이트를 약속한 날이다.

불현듯 그 여자가 떠오르면서 조용한 일상에 불안함이 섞여든다.

우리를 언제든 파괴할 날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단 생각에 초조한 경계심이 들기 시작했다.

밤이 깊은 늦은 시간엔 여지없이 머릿속을 파헤쳐 올라올 때가 있었지만 굳이 꺼내 들고 싶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런 늦은 시간이기에 예민함이 피어올랐을 뿐일 거다.


우진 씨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놓아주지 않아 술자리를 늦도록 함께하고 있다.


'마치고 만나기엔 너무 늦어요. 바로 집에 가면서 전화해'

이미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라 아쉽지만 먼저 문자를 보냈다.


'아니야, 곧 나갈 테니까 잠들면 안 돼. 늦게라도 보고 싶어'

우진 씨는 떼를 부리는 어린아이 같아서 귀엽기도 하다.

미소가 지어지는 표정을 거울에서 확인한 후 다시 머리를 빗어본다.

고집이 센 우진 씨를 막아서는 건 소용없다. 술을 마시면 더 고집스러워지기 때문이다.


30분 후 술을 꽤나 마시고 집 앞으로 온 우진 씨를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서 지상으로 차를 빼놓았다.


"이렇게 많이 마셨으면 바로 가지"

예상보다 더 술에 취한 듯 보이는 우진 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피곤한 일상을 보내는 그가 안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꼭 보고 싶어서. 바로 가면 너무 섭섭하잖아"

기분 좋아 보이는 우진 씨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보인다.


갑작스럽게 전화벨이 울려 우진 씨가 잠시 전화를 받고 있을 때였다.


차 문이 벌컥 열리면서 씩씩대며 소리를 지르는 그 여자가 달려든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내려! 내리라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며 놀란 나를 그 여자는 다짜고짜 끌어내린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너무 놀란 나는 차에서 정신없이 끌어졌다.


"뭐? 다시 말해봐! 아까처럼 다시 말해보라고!"

나를 끌어내리지만 우진 씨를 보며 소리를 지른다.


"어째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피를 말려!!"

억울한 듯 주저앉는 그 여자의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 집 앞에서 그와 싸우는 저 모습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나와는 상대하지 않는 그 여자도 이상했지만 놀란 우진 씨가 그 여자에게 해명하듯 어쩔 줄 몰라한다.


"진정해. 이러지 않아도 돼. 가자. 여기서 이러지 마."

우진 씨는 그 여자의 팔을 잡으며 얼버무리듯 얘기한다.


"왜?!! 여기서 얘기해! 대체 왜 여기와 있는 건지 설명할 필요 없어! 이제 여기서 똑바로 이 여자한테 얘기하라고!! 빨리!!"


나를 노려보며 울분을 쏟아낸다.


"놀랄 것 없어! 지금까지 이 남자가 어떻게 했는지 바로 알겠지? 이게 이 남자의 정체라고! 내가 미친 여자처럼 보여? 아니! 미친 건 김우진이지 내가 아냐!! 똑바로 보라고!"

"친구들이랑 3차를 간다고? 여기가 역삼동이야?"


말리는 우진 씨를 뿌리치며 그 여자가 한 대사 중 가장 심하게 들린 소리다.

그 여자도 우진 씨의 일정을 알고 있다.


더 이 자리에 같이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한 순간에 모든 걸 알게 되기도 했지만 이제 저 두 사람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뒤돌아 집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그 여자가 잡아 세운다.

"지금 더 얘기하고 가! 확실하게 전부 알아야 하지 않겠어?"


나를 잡는 그 여자의 손을 끌어내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집에 들어왔다.


현관문을 닫으며 주저앉았다.

당황한 건지 그저 놀란 건지 주체할 수 없지만 정확히 알겠는 건 우진 씨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거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오늘은 이만 하루를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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