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가 주는 함정
이 장면은 당신의 지식이 어떻게 관점을 방해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최근 박사과정 하시는 학생들과 포스트닥 (post-doctoral fellows, 박사 후 연구원)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했다. 아무리 과학이라지만 전공하는 분야가 너무 다양하고 또 직접 프로젝트에 사용하는 데이터 종류도 폭차가 넓어서 어떤 데이터를 가지고 진행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많았다. 한 가지 주제로 통일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과학자라면 관심 있을만한 주제가 가장 나을 듯싶었다. 최근 네이처 인간 행동 <Nature Human Behaviour> 학술지에 나온 '일반인들이 과학자들을 신뢰하고 있는가'에 관한 주제의 논문을 이용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오면서 뉴스 보도등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질문 중 하나가 '지금 우리는 과학을 부정하고 불신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가'다. 미국 현지에서 과학자들과 연결이 많은 생활하는 필자도 그런 경향을 피부로 느끼긴 했다. 바이러스 자체가 과학 실험하다 퍼진 것이라는 거짓 주장부터 자신과 상대방의 안전을 위해 마스크 하는 것조차도 개인적인 자유를 깨뜨린다며 반발하는 시위까지 보아왔다.
정말 과학자들에게 불신을 느끼고 있을까? 68개의 국가에서 7만 명이 넘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다행스럽게도 과학자들을 아직까지 신뢰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다만, 과학자들과 일반 시민들이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구 방향이 약간 엇갈린다는 점이다. 그만큼 시민들과의 소통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과학자들은 자기들끼리만의 세상에서 연구하고 돋보이면 끝이다라는 뉘앙스가 좀 있는 것 같다. 굳이 연구실 밖으로 돌려고 하지 않고 과학만 성실히 하면 과학자로서 충실한 임무를 한다는 생각말이다. 하지만 요즘에 뜨는 유튜버나 팟캐스트인들을 보면 본인 연구나 논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시민들과 소통하려는 과학자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 잘못된 지식이 많을수록 전문가가 나서서 인식을 바꾸어주려는 노력도 하나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과학자란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그 의미에서 더 나아가, 필자는 과학적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세상의 모든 이들이 과학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특별한 과학 교육을 받지 않고도 창의적인 사고와 발상의 전환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많은 사람들 또한 과학적 접근 방식을 깨치고 응용할 줄 아는 대단한 분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도 뇌과학이란 학문을 공식적으로 배운 것이 대학원에 들어간 이후였다. 학사 과정 중 해부학 실험에서 '대뇌에는 전두엽이라는 게 있어' 정도로만 배운 것이 전부였다. 특정 영역의 뉴런이 어떻고 하는 더 전문적인 내용은 학사 졸업 후 처음 일했던 뇌과학 연구실에서 배워 그나마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에모리대학교에서의 박사과정 1학년 1학기, 뇌는커녕 뉴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필자에게 한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것이 마음에 와닿았다.
"지금 교과서를 외우려고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여러분이 졸업할 때 즈음이면 싹 바뀔 내용이니까."
"대신 더 중요한 것은 역사 속 과학자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던졌고, 또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어떤 실험들을 해봤는지에 대한 고민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에요."
처음으로 지식이라는 것을 마냥 책에서 읽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교수님의 중간고사 시험 문제도 유별났다. 단순히 알고 있는 지식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기까지의 그 과정을 설계하는 데에 중점을 두셨다. 무작정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답만 찾는 것이 아닌 그 결과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신 분이다. 물론 기본 지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아는 것이 있어야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방법을 창안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알면 알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다 보니 괜히 잘못 끼어들었다가 말실수하면 어쩌나, 지금까지 지켜왔던 베테랑 전문가라는 사회적 지위가 한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움츠리는 분들이 많다. 객관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량을 과대평가한다는 연구도 보아왔다. 이것이 그 유명한 더닝 크루거 효과 (Dunning-Kruger effect)다. 게다가 SNS의 발 빠른 정보공유성이 잘못된 정보나 터무니없는 주장을 널리 퍼지게 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한다. 모를수록 더 당당하게 나설 수 있고 누구나 인터넷만 있으면 입지를 넓힐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누군가 제대로 배우고자 할지라도 하루에 맞닥뜨리는 정보량은 인간이 따라가기에 역부족일만큼 많다. 종종 우리가 '정보의 홍수'에 살고 있다고 표현한다. 전 세계적으로 하루동안의 데이터 생성량만 402 엑사바이트 (402 exabytes, 또는 402만 테라바이트)에 이른다고 한다. 과연 차고 넘치는 홍수라 할만하다. 그 많은 정보 중 우리 생활에는 얼마나 많이 써먹을까? 기업을 대상으로 한 2021년 포레스터 리서치 (Forrester Research) 통계에 의하면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정보의 88%가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제대로 써먹지 못해 덜 활용된 정보를 돈으로 환산하면 미국 정부가 일 년에 쓰는 양과 맞먹는다. 이것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정보의 가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순전히 정보의 양에 대해서 말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같은 정보일지라도 그 정보를 보는 시각으로부터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아래 사진이 하나 준비되어 있다. 조작되지 않은 진짜 사진이다. 당신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위 사진을 에이미 헐맨 (Amy E. Herman)이 쓴 <시각적 지능 (Visual Intelligence)>이라는 책에서 처음 보았다. 한참 동안 봤는데도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몰랐다. 이후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진을 들이밀곤 했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항상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도 무엇을 보았는지 필자에게 댓글로 알려주시길 바란다. 이게 도대체 뭔가 궁금하시다면 계속 읽어주시라.
텍스트나 사진, 동영상과 같은 자료는 독자나 시청자가 받아들일 때 각자 부여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고 치자. 같은 책이나 영화를 보고도 그에 대한 평가가 천차만별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대해 남긴 리뷰 중 '그냥 여러 사람들 집에 들락거리는 이야기뿐이다'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이와 달리, 수치로 나타나 있는 데이터를 보면 두리뭉실하지 않아 정확하고 객관적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생각보다 데이터가 모호할 때가 많다. 같은 데이터를 보더라도 전혀 다른 것에 초점을 두고 풀이하면 그 해석이 정반대일수도 있다. 매일 보도되는 정치 뉴스만 봐도 그렇다. 오바마대통령 시절에 나왔던 뉴욕타임스 기사가 주는 레슨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분명 똑같은 실업률 데이터였는데 정치색에 따라 데이터 스토리텔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객관적'인 데이터 분석의 함정이다.
이와 관련된 연구로 필자가 자주 써먹는 예가 있다. '지식의 저주'라는 제목을 붙인 논문 저자들이 참 존경스럽다. 데이터를 직접 분석하고 설명해 주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는 이의 입장인 사람, 그들 모두에게 중요한 논문이라고 본다. 본래 알고 있던 지식이 눈앞에 있는 데이터를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특히 애매한 데이터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비록 영문으로 되어있지만 관심 있는 독자들은 이 연구에 대해 제1저자가 재미있게 풀이해 놓은 블로그도 한 번 읽어보시길 적극 추천한다.
많이 아는 것이 모르는 것만 못할 수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앞서 말한 '근거 없는' 자신감도 조금씩은 필요한가 보다라고. 그래야 무작정 나서서 실패하더라도 빨리 다른 시도 해보며 남보다 더 빨리 배우지 않겠는가. 그래서 요즘 다세대 문화가 마음에 와닿는다. 기업 안에서도 세대 격차가 클수록 서로로부터 나이에 상관없이 많이 배울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하며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워크숍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혼자 살 수 없는 인간이다. 바로 '공감'하기로부터 '공존'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감하는 것이 정보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 물을 수 있겠다. 질문을 바꿔보자면 '새로운 정보를 배우는 데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이다.
이번 워크숍에 참여한 에모리, 조지아텍 학생들과 포닥들은 같은 논문 자료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려는 연습을 했다. 워크숍은 더블 에이전트 미션을 수행하는 스파이 훈련장 콘셉트로 꾸몄다. 그 안에서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보는 스파이로서 첫 시크릿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경험은 전략적 통찰과 공감 능력을 동시에 키워주는 효과가 있었다. 같은 데이터라도 정치인이나 기업인 또는 과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하는 것은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끝나고 다들 'eye-opening'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시각을 넓혀보자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으므로 이런 피드백을 들을 때 참 뿌듯했다. 이런 경험적 배움 (experiential learning)을 진행한 것도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능동적으로 해보는 것이 가장 머릿속에 잘 입력된다는 관찰을 기반으로 학습의 효율성을 높여주기 위함이었다. 도전하는 모든 일을 실험과 같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다.
과학자들이 대중들에게서 신뢰를 얻으려면 그들의 시각을 이해해 보려는 마음이 우선이다. 이는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세상 모든 이의 몫이다. 솔직히 인간이 보통 살면서 다른 사람의 관점을 특별하게 관찰하고 공감해 보려는 노력을 평생 얼마나 할까? 노력한답시고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고 남의 감정을 어찌 이해하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잘 모르는 감정을 느껴보자는 것이 아니다. 한 번쯤 그럴 수 있겠구나라고 인정해 보자는 것이다.
중요한 만큼 뇌에도 공감 능력 형성에 도움을 주는 뉴런이 있다. 바로 거울 뉴런 (mirror neuron)이다. 다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볼 때마다 거울 속 나를 보듯 뇌의 특정 움직임을 주관하는 영역에서 똑같은 패턴으로 활성화되는 신경세포이다.
미국에서는 공감한다는 표현을 이렇게 쓴다.
Walking in someone's shoes.
즉,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그 사람이 되어 걸어보자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 난감했다. '내가 내 신발을 벌써 신고 가고 있는데 누가 들어올 수 있을까.' 필자가 전형적인 T형이라 생각하실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신세계 워크숍을 진행하는 이유는 하나다. 정보 통신이며 인공 지능 등 다양한 기술 발전이 다문화적 사회인들을 더욱 가깝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공유하면서 점차 공감능력은 떨어지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보다 나에게 어떤 베네핏이 돌아올지에 대한 자기중심적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 두 가지가 굳이 철저히 구분될 필요는 없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 달성에도 도움 될 수 있지 않은가. 이 워크숍 참가자들도 결국 본인 프로젝트를 어떻게 하면 더욱 임팩트 있게 할 수 있나를 배우러 온 것이다.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아야 두려울 것이 없듯이, 날이 갈수록 변화 속도가 빨라지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정보 해석의 차이는 곧 전략의 차이로 이어진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실질적인 생존 전략인 공감을 통해 다른 사람의 관점을 걷는 '신발을 신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전략하는 뇌'의 핵심이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분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앞서 본 사진을 다시 소개한다. 다름 아닌 소다. 위로 올라가 처음의 사진을 다시 봐보자.
소가 안 보일 때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당신의 지식이 어떻게 관점을 방해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