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에서 배움을 배운다
최근 네이처학술지 (Nature)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을 어렵지 않게 한글로 풀어써보려 한다. 혹시 영문 논문을 읽어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가 마련되어 있다.
왜 그 순간들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일까?
잠깐 학교 시절로 돌아가서 쉬는 시간을 생각해 보자. 비록 10분이지만 온갖 친구들이 여기저기 왁자지껄한다. 십 분 안에 할 수 있는 얘깃거리들이 어찌 이리 많은지. 하긴, 예전에 이효리 님도 10분 만에 목표 달성할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러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면 각자 자리에 돌아와 앉기 시작하고 선생님이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오시면 쉿 조용해진다.
뇌도 마찬가지다.
뇌는 중요한 순간에 '침묵'할 줄 안다. 그저 침묵할 타이밍을 아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지 모르고 있었을 뿐.
기억에 남는 이유도 여러 가지이지만, 오늘은 목표 달성을 위해 중요한 특정 정보가 어떻게 기억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여행 중 처음 들렀던 식당이 너무 맛있어서 다시 찾거나, 지인에게 '여기 꼭 가봐!' 하며 추천했던 기억이 있는가? 그건 바로 우리의 뇌가 그 장소를 ‘기억할 만한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소 기억 (spatial memory)은 우리가 새롭게 접한 환경 속에서 중요한 정보를 간추려 저장하게 해주는 뇌의 메커니즘 중 하나이다. 이는 목표 기억 (goal memory)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뇌과학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보통 우리 뇌가 바깥세상에서의 온갖 자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뇌는 들어오는 정보를 분별력 있게 처리한다. 새로운 모든 정보를 다 저장하지 않고, 그중에서도 특별한 감정이나 행동 결과를 불러일으킨 단서만을 추려서 기억하는 능력이 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그 일이 오랫동안 기억에 머무는 것도 그 이유다. 물론 무엇이 중요한 지는 뇌주인의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통해서 걸러낸다. 그래서 똑같은 일이 있어도 상대방과 다른 것에 포커스를 잡아 전혀 다른 기억을 할 수 있다.
그 기억의 중심에는 해마 (hippocampus)가 있다. 1971년, 영국의 존 오키프 박사는 해마에서 특정 장소에서 반응하는 장소 뉴런 (place cells)이라는 신경세포를 처음 발견했다. 이 발견이 훗날 오키프 박사에게 2014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쥐어준 장본인이다. 이어 해마 영역에서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도, 움직임 방향 등 다양한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저장하는 뉴런도 발견되었다. 심지어 제니퍼 애니스턴과 같은 유명 배우를 보면 그 배우에게만 반응하는 뉴런도 있다. 이것이 해마가 인간에게 있어 기억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장소 뉴런이란, 말 그대로 어떤 특정 장소를 대표하여 머릿속에 저장하는 뉴런이다. 예를 들어, 회사 회의실 한 구석에 자주 앉다 보면 그 공간을 대표하는 뉴런이 계속 활성화되는 것이다. GPS처럼 나중에 다시 그곳을 찾아갈 수 있게 저장해 놓는 방식이다. 그리고 만약 그 자리에서 승진 소식을 듣는 것과 같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생긴다면 그 공간은 더욱 ‘특별한 장소’로 인식된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장소 뉴런이 함께 활성화되며 더욱 강하게 각인된다. 흔히 말해 '단가'가 높아진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뇌가 ‘바로 여기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지 그 구체적인 원리는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가 제1저자로 참여한 연구가 해마의 특정 뉴런으로부터 실마리를 찾았다.
어떻게 특별 장소가 머릿속에 저장되는 것일까?
미국 에모리대학교 (Emory University)와 조지아텍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공동 수행한 이 연구는 가상현실 환경에서 먹이를 찾아 달리는 생쥐를 이용해여 실험을 진행했다.
동그란 모양의 트랙을 달리며 생쥐는 우유라는 보상 장소를 스스로 찾아가는데 그 장소를 반복적으로 배우면서 달라진 특유의 행동이 있다. 하나는 목표 지점에 다가설 때마다 속도를 급격히 줄인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먹이가 나오기도 전에 혀를 내밀고 기대하듯 기다린다는 점이다. 가상현실 환경에서도 보상 장소를 예측하는 단서를 배워 나타나는 행동 양상이다.
쥐가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 때 해마 속 뉴런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센서로 미세한 전압 변화를 측정했다. 3700여 개의 뉴런도 하나하나 관찰했다.
우리 뇌의 뉴런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흥분성 뉴런 (excitatory neuron)과 억제성 뉴런 (inhibitory neuron)이다. 흥분성 (excitation)과 억제성 (inhibition)이란 이름은 상대 뉴런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 흥분성 뉴런은 파티 호스트처럼 다른 친구들을 파티에 초대하며 흥분시키듯 더 활동성을 활발하게 해 주고, 반대로 억제성 뉴런은 남을 눈빛으로 제압하는 직장 상사처럼 다른 뉴런을 조용하게 만든다. 운전할 때도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가속하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정지하듯이 뉴런에도 활동성이 다른 종류가 있다.
수로 따지면 흥분성 뉴런이 압도적으로 많다. 전체 뉴런 인구의 고작 10프로 정도밖에 안 되는 억제성 뉴런일지라도 뇌의 흥분성을 조절하는 데 중요하다. 이 두 가지의 뉴런들이 밸런스를 잘 맞춰줘야 갑작스러운 발작이나 뇌전증과 같은 증상을 피할 수 있다. 뇌과학 실험 연구를 보면 흥분성 뉴런에 관한 연구가 훨씬 많고 오래됐는데 이것은 소수를 관찰하기도 어렵거니와 뉴런 활동을 측정하는 실험 도구가 활동이 '있다'에 중점을 두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뉴런이 어떤 자극에 '의하여' 뭔가 반응이 '생김'을 관찰할 수 있어야 행동이나 다른 결과물에 대입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앞서 말한 장소 뉴런도 피라미드처럼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흥분성 뉴런에 속한다.
그럼에도 우리 연구진은 이번 연구에서 소수의 억제성 뉴런에 포커스를 맞췄다. 장소 뉴런이 아무리 공간 기억에 중요한들 이도 그 위에 보스가 있게 마련이다. 역시 억제성이 이를 조절함을 밝혀냈다.
앞의 실험으로 돌아가보자. 쥐가 잘 알고 있는 먹이 장소에 가까워질 때 놀라운 관찰을 했다. 바로 억제성 뉴런이 쉿 하고 조용해지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한 두 개의 뉴런이 아니라 억제성 뉴런 중 반 정도가 활동 감소를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여기 중요하니까 놓치지 말고 배워' 하는 것처럼 억제 신호가 조용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억압에서 벗어난 장소 뉴런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학습의 문을 열어준 것과 같았다.
사실 쥐가 달리는 속도가 감소하는 보상 자리에서 억제성 뉴런의 활동성이 감소하는 관찰을 처음에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억제성 뉴런은 동물이 이동하는 속도에도 반응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속도와 장소의 밀접한 연관성을 풀어낼 방법을 여럿 찾았다. 그리고 단순히 속도 감소에 따라 줄어드는 활동성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이와 관련된 재미난 실험도 언급하고 싶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하겠다.
지금까지 억제성 감소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장소 근처를 특정적으로 배울 수 있게 관문과 같다고 했다. 정말 근거 있는 말일까 생각할 만하다.
만약 그 자리에서 억제성 감소가 아니라 반대로 증가였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 검증하기 위해 광유전학 (optogenetics)이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특정 파장의 빛을 이용해 신경세포의 활동을 자극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실험에서는 푸른빛의 자극을 이용해 특정 억제성 뉴런의 활동성을 조절하였다.
이 자극으로 알아낸 사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새로운 환경에서 처음 배울 때, 억제 감소가 일어나야 할 보상 장소에서 억제성을 활성화하면 쥐는 그 장소를 배우지 못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보상 장소가 아닌 다른 지점에서 억제성을 방해하면 #1에서 학습 실패했던 쥐도 문제없이 배운다.
오래전에 배워 친숙한 보상 장소는 억제성을 방해해도 기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신기하지 않은가. 소수의 억제성 뉴런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새로운 기억 형성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배움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도 방법만 조금 바꿔 중요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조해서 가르쳐주면 잘 따라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생긴다. 중요한 것을 언급하기 전에 갑자기 조용히 침묵하며 궁금증을 유발하면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뇌는 언제 어디서 억제 신호를 보내야 할지 그 타이밍을 안다. 그리고 억제성 뉴런에 통찰력에 의해 장소 뉴런이 언제 어디서 활발해질지 결정된다. 꼭 배워야 하는 보상 지점에서 그 장소를 대표하는 장소 뉴런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배워야 할 정보의 '정확도'를 높여준 것과 같다. 불필요한 정보를 걸러내고 꼭 알아야 할 핵심만 콕 집어주는 것이다.
장소 뉴런 말고도 해마 영역에는 기억 형성 관련 연구에는 샤프웨이브 리플 (sharp-wave ripples)이라는 고주파 현상이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인간의 뇌에서도 존재하는 뇌파 종류가 여럿 있는데 특히 고주파인 리플은 새로운 정보를 배울 때 보이며, 특히 배운 것을 '되새김'할 때 움직임 없이 조용히 있거나 수면 중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억제성 감소를 보상 장소에서 방해한 쥐를 확인해 보니 이 배움의 좌표라 부를 수 있는 리플 현상이 확연히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보상 장소가 아닌 곳에서 방해하면 정상적 리플 현상이 나타났다. 특정 장소를 기억해야 하는 숙제에서 그 정보를 집중 처리하는 프로세스가 억제성과 강한 연관이 있음을 드러냈다.
억제성 뉴런이 새로운 먹이 장소 정보를 기억하는 데 중요하다고 나왔지만 과연 먹이가 아닌 다른 중요한 정보에도 신경을 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번에는 원 모양이 아닌 와이자 (Y) 모양의 트랙을 이용하여 쥐 실험을 진행했다. 이 트랙에서 쥐는 가운데의 긴 통로를 지나가면서 본 그림 패턴을 인식하고 보상과 관련된 단서가 오른쪽에 나왔는지 아니면 왼쪽에 나왔는지 기억해야 한다. 한마디로 쥐의 미션은 기억해 둔 보상 관련 단서가 나온 방향으로 틀어야지만 트랙의 끝에서 먹이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함정이 있는데 처음에 나온 단서 (initial cue)가 나중에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뒤에 나온 새로운 단서 (update cue)가 본래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라고 나오면 어쩔 수 없이 행동을 뒤집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다들 회사로 운전하며 가다 갑자기 집에다 놓고 온 파일이 생각나 다시 돌아간 적이 있지 않은가.
업데이트 단서가 나올 때 과연 억제성 뉴런은 어떻게 반응할까? 행동 양식을 전환할 수 있게 하는 중요 요소이지만 보상이 오는 타이밍은 아니지 않은가.
놀랍게도 억제성 뉴런이 보상 장소에서'만' 활동성이 감소하는 현상을 관찰했다. 아무리 중요 정보라지만 배고픈 쥐에게서 먹이라는 보상은 최대 목표물이다. 가장 중요한 기억을 저장케 가능한 것이 바로 억제 신호다.
오늘은 침묵하는 타이밍을 아는 뇌에게서 배움에 대해 배웠다. 뇌과학이 어렵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이 연구를 통해 실전적으로 어떻게 써먹을지에 대해서도 적어나갈 예정이다. 뇌과학에 생각을 담아 미국에 길 찾기하고 있는 어느 한 뇌과학자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지켜봐 주셨으면 한다. 구독이나 댓글, 비즈니스 문의, 강연 제의 등은 무조건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