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식 – 집이 타고, 아버지가 사라진 날

시작의 그림자

by 따뜻한시선

무언가 하나가 빠진 따뜻함.

아버지의 온기가 없었다.



2월이 내뱉지 못한 운동장의 냉기에, 정호는 시린 발끝을 움추렸다.

정호는 꽉 쥔 손이 끈적해지자, 손을 앞으로 모아 다급히 문질렀다.

중학교 첫 등굣날 아침, 집을 나서는 정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씩씩해라.”

입학식 내내, 그 말이 귓바퀴를 서성였다.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3년 전, 할머니는 둘째 고모가 모셔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덟 살 터울의 형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했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평소처럼 술에 잔뜩 취해 돌아왔다.

정호는 아버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느끼며 옅은 잠에 빠져 있었다.


“씩씩해라.”

아버지는 몇 번이고 흐느끼며 낮게 말했다.

정호는 그날 아버지가 다른 날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하지만 늘 술에 취하면 하는 신세 한탄이라 여기고 다시 잠에 빠졌다.


밤중에 정호는 한기에 눈을 떴다.

겨울밤을 견디게 해 주던 건 늘 세 가지였다.

아버지의 품, 나무틀에 넣은 백열전구, 그리고 두꺼운 이불.


아버지와 정호는 백열전구 하나를 나무틀에 넣어 이불속에 넣어두고 잤다.

전구는 열을 내지만, 겉면이 뜨거워 불이 날 수 있어 아버지가 직접 나무틀을 만들어 감쌌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온기.


그 온기와 아버지의 체온, 그리고 두꺼운 이불.

이 세 가지가 함께할 때에만, 정호는 겨울밤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이불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정호는 추위에 떨며 눈을 떴다.


무언가 하나가 빠진 따뜻함.

아버지의 온기가 없었다.


정호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부엌 쪽 문을 열어보았다. 아버지는 없었다.

부엌 바닥엔 며칠 전 통장아저씨가 주고 간 쥐약봉투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마루로 향한 문을 열고 나가 아버지의 신발을 찾았다.

마루로 이어진 옆방 앞에 아버지의 신발이 있다.

옆방으로 건너가 문을 여니 연탄가스 냄새가 확 들이쳤다.

방 한편에 연탄화로가 옅은 붉은빛을 내고 있다.


화로 덕분에 방안이 따스하다.

아버지는 외출복을 입은 채 방 가운데 누워 있었다.

정호는 작은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방문도 활짝 열었다.

큰 방으로 돌아가 두꺼운 이불을 가져왔다.

백열전구의 온기가 약간 남아 있던 이불을 아버지에게 덮어주고,

방문은 조금만 열어 두었다. 작은 창문은 닫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으로 파고들어 다시 잠을 청했다.


정호는 꺼끌 하게 눈을 떴다.

아버지가 없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서니, 부엌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구토를 하며 울고 있었다.

정호는 알 수 없는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그리고 커다란 아버지의 등에 매달려 함께 울었다.


‘광무동 산 37번지’,

장군산 산동네에서 가장 높은 집이 정호와 아버지의 사글세 집이다.

전기는 끊겼고, 집세는 밀렸다.


정호는 입학식이 끝나고 종고산 허리를 따라 이어진 소방도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바다를 향한 완만한 중턱을 돌아 장군산을 바라보니,

산동네 가장 높은 곳, 자신의 집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빨려 올라가고 있었다.


정호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갔다.

종고산 중턱에서 장군산 중턱까지, 심장이 터질 듯 달렸다.

골목길을 달려 올라가던 정호는, 낯선 사내 둘에게 붙들려 내려오고 있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씩씩해라.”

아버지는 차분해 보였다.


정호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아버지의 당부대로 씩씩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붙들고 있는 낯선 사내 둘에게 울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로, 정호는 4년 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집은 외떨어진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불이 다른 집으로는 번지지 않았다.

소방차가 올라올 수 없는 산동네였다. 방 두 칸짜리 작은 목조주택은 순식간에 타버렸다.


소방대원이 도착했을 때, 집은 바닥만 남고 잔불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호는 배가 고팠다.

며칠 전 외상으로 가져온 라면 한 박스가 떠올랐다.

그리고 형이 사준, 아끼던 장난감 M16 소총도.


총을 넣어두었던 장롱은 밑부분만 남아 있었다.

장난감 총은 금속으로 된 긴 총열을 제외하고 모두 녹아 있었다.


정호는 총열을 막대기 삼아 아직 열기가 남은 부엌 바닥을 뒤졌다.

라면 한 박스는 타버렸지만, 아래쪽은 타다 만 라면이 남아 있었다.


정호는 봉지에 눌어붙은 윗부분을 떼어내고, 누렇게 된 타다 남은 생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그중 완전히 타지 않은 부분만을 골라 모았다.


그때, 행기가 왔다.

행기의 집은 정호네 집에서 밭 하나를 두고 아래에 있었다.


정호는 생라면을 건넸다.

둘은 불에 탄 마루를 치우고 나란히 앉았다.


정호의 집에서는 여수 시내 전경과 저 멀리 돌산대교가 보였다.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라면땅 같다. 맛있어.”

행기가 생라면을 먹으며 말했다.


“조금 쓰다. 설탕 뿌려 먹으면 좋겠다.”

정호는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저녁에 어디서 잘 거야?”

행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갈 데 있어.”

정호는 씩씩한 척 대답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오늘 중학생이 된 정호는 남은 라면을 책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천천히 산 아래로 내려갔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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