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졸업앨범에서 오려낸 사진.

by 따뜻한시선

희망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형은 그것을 책상 앞에 붙여주었다.



“너희 학교에 ‘수진’이라는 애 알아?”


하루 종일 밴드 연습실을 구하러 돌아다닌 두호는

저녁 무렵 자취방에 놀러 온 동생 정호를 보자 뜬금없이 물었다.


정호는 형이 갑자기 어떤 여자아이 이름을 묻자 잠시 뜸을 들였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대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처음 들어봤어요.”

여덟 살 어린 동생 정호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대답했다.


“너랑 같은 6학년이라고 하던데?”


“음… 잘 모르겠어요.”

같은 6학년이라도 반은 12개나 됐고, 한 반에 50명쯤 있었다. 6년 동안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못한 동급생들도 많았다.


“너희 학교 근처에서 연습실 찾아보다가 놀이터에서 만났어. 길도 똑 부러지게 알려주고, 아주 예쁘던데?”


“아, 그래요?”

그날 정호는 처음으로 ‘수진’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아주 예쁜 아이라는 말만 마음에 남았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정호는 고소동 산중턱,

장군섬과 돌산대교가 보이는 집에서 형과 단둘이 살기 시작했다. 이사를 마친 첫날, 두호는 정호의 국민학교 졸업앨범을 펼쳐보았다. 그러다 한 아이를 가리켰다.

“얘가 수진이야. 한 번도 본 적 없어?”

정호는 그제야 수진이라는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아마 학교에서 몇 번 스쳐갔을지도 모르지만, 기억나진 않았다. 형 말대로 정말 예쁜 아이였다.

두호는 졸업앨범에서 수진의 사진을 오려내어 책상 앞 책꽂이에 투명 테이프로 붙였다.

“넌 나중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랑 아니면, 정말 똑똑한 사람이랑 결혼해야 해.”


그날 이후로 정호는 책상에 앉을 때마다 수진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 아직 이성에 대한 감정은 없었다. 그저 책상 앞에 붙은 연예인 사진처럼, 그냥 거기 있는 존재였다.


정호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가난한 형편에서도 공부를 잘하면 어른들의 칭찬을 듣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쉽게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걸 일찍 알게 됐다. 그래서 학교는 빠지지 않고 다녔다. 숙제는 꼬박꼬박 해냈고, 시험 전 벼락치기로 반에서 10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에게 공부는, 측은함 대신 칭찬을, 무시 대신 존중을 이끌어낸 조용한 방패였다.


숙제를 하든 시험공부를 하든, 책상에 앉으면 항상 수진이 있었다. 그 사진은 누군가가 연예인 사진처럼 붙여둔 희미한 희망이었고, 정호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곤 했다.


중학교 3학년.

여수는 당시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여수고는 명문고로 꼽혔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길이 어려운 현실에서, 정호는 실업계인 여수공고를 선택할지, 여수고를 선택할지 고민 중이었다. 여수공고를 졸업하고 굴삭기 기사를 하는 젊은 집주인과, 여수고를 다니다 중퇴하고 음악을 하는 형 사이에서 정호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현실적인 선택과 꿈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 고민을 두호 형에게 털어놓았다.

형은 어린 동생의 성숙한 고민에 마음이 저렸다.

말해주고 싶었다. ‘여수고 가라. 넌 해낼 거야.’

하지만 확신 없는 조언이 동생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다.

“네가 결정해. 어떤 결정이든, 넌 잘할 거야.”


여덟 살 터울의 두호는 매우 공부를 잘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교내 우수상을 놓친 적이 없었고, 지역 내 성적이 우수해 교육감상까지 받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두호는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정호는 형의 상장과 상패가 차곡차곡 담긴 딱딱한 007 서류가방을 가끔 열어보곤 했다. 그 가방은 정호에게 형의 빛나던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보물 상자 같았다. 정호는 형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최상위권이던 형도,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의 술주정, 가난, 그리고 소아마비로 절뚝거리는 오른쪽 다리에 대한 원망이 형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결국, 두호는 등록금을 낼 수 없어 여수고를 자퇴해야 했다. 이후 신발공장, 조립공장을 전전하다, 지금은 외삼촌이 운영하는 카바레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형은 자신의 상황이, 아무런 기반 없이 버텨야 하는 미래가, 동생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다.


부모 없이 진학 상담을 해야 했던 정호는 담임선생님과 짧은 상담을 했다.

“빨리 돈을 벌려면 여수공고가 나을까 고민돼요.”

선생님은 놀라움과 연민이 섞인 눈빛으로 정호를 바라봤다. 신문 배달과 매점 일로 생계를 이어가며, 단 한 번의 결석 없이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 온 아이. 기특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여수고 가.”

짧고 단호한 말이었다.


하지만 정호는 선생님의 음성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그래서 왠지 모를 서러움을 누르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은 정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건 위로가 아닌, 응원의 손길이었다.

선생님은 정호를 믿었다.


그 따뜻한 손의 감촉은 정호의 고민을 녹여냈다.

그날 이후로 정호는 책상 앞에 앉는 시간이 조금 달라졌다. 이제는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를 믿어보기 위한 싸움이었다.


공부에 집중이 안 될 때면 무심코 책상 앞의 수진을 바라봤다. 희망처럼, 조용히 자신을 응원해 주는 존재.

형이 붙여준 사진이지만, 이제는 자신의 마음에 자리한 사람이었다.


일요일, 시립도서관.

열람권이 매진되어 자유열람실에서 공부하던 정호는 맞은편에 누군가가 앉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수진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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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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