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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살짝쿵?!(가격표가 보이지 않았다)

가격표가 보이지 않았다

by 필경 송현준

가격표가 보이지 않는 순간


기름이 뚝 떨어졌다. 계기판의 바늘은 텅 빈 칸을 가리키고 있었고, 맹렬하게 깜빡이는 주유 경고등은 이제 바닥이라는 절박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분명 목적지는 아직 한참 먼데, 불안감은 온몸을 조여오는 듯했다. '아, 휴게소에서 넣었어야 했는데…' 운전대를 잡은 손에 땀이 흥건했다. 이미 지나친 후에야 밀려오는 후회는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뒤늦은 자기 원망은 지금 이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딘가에 분명 주유소가 있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을 붙들고 가까스로 램프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주유소 간판 하나 없는 낯선 시골길뿐이었다. 불안은 초조함으로 바뀌었고, 심장은 발소리를 내는 듯 쿵쾅거렸다. 차의 엔진은 이제는 정말 마지막임을 알리듯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이젠 정말 더는 안 될 것 같아…' 절망이 목까지 차오르려는 바로 그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이는 불빛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교차하는 익숙한 불빛. 그것은 주유소 간판이었다. 그 순간, 그 흔하디흔한 간판은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막의 여행자에게나 보일 법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희망찬 상징처럼 보였다. 평소 같으면, 나는 가장 먼저 주유소 앞의 커다란 전광판에 쓰인 기름 가격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L당 얼마, 고작 몇 십 원의 차이에도 아까워하며 고민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달랐다. 내 눈에는 그 어떤 가격표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 시야에 보이는 것은 오직 주유기 그 자체였다. 이 절박한 순간, 휘발유 한 방울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시 내 눈을 지배했던 '가격'이라는 잣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이 자리, 이 시간에 '주유소가 있음'에 대한 순수한 감사만이 나를 지배했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본다.


이처럼 삶의 중요한 순간들은 예기치 않게 찾아와 우리의 시야를 바꾼다. 평소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돈이나 효율성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일상의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 가격표 너머의 진짜 가치를 보게 되는 순간. 나의 기름 없는 절박함은, 나를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 고마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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