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할아버지는 오늘도
낡은 정원에서 붉은 동백 한 줌을 딴다.
햇살이 흰 머리결 위에 가만히 흩어지고,
그의 손끝은 오래전 누군가의 이름을 더듬는 듯
느리고 따뜻하다.
바람결에 떨어진 꽃잎 몇 장을
낡은 코트 단추구멍에 꽂는다.
스치는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 붉은 빛은 말없이 남아 있는 옛 약속처럼
가늘게 흔들린다.
잠시, 아주 잠시
그의 눈이 허공의 한 지점을 스친다.
그곳에는 한때 그의 하루를 밝혔던 얼굴 하나가
아직도 조용히 숨 쉬는 듯하다.
손주가 두 손을 내밀자
꽃잎들이 소복이 담긴다.
작은 손바닥 위에서 따뜻한 숨결 같은
봄 한 송이가 피어난다.
할아버지는 그 손을 바라보며
자신이 건넸던 수많은 마음도
이렇게 가벼운 꽃잎이었을지 생각한다.
“할아버지, 왜 꽃은 예쁘게 피었다가 금방 떨어져요?”
그는 고개를 들어 지나간 시간의 하늘을 바라본다.
푸른 빛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하나가 느릿하게 떠오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얼굴을 한 번 더 마음속에서 불러본다.
그리고 천천히 웃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동백의 붉은 빛과
아이의 손바닥 위의 작은 봄이 그 미소 속에서 한순간 나란히 머문다.
그가 말하지 않은 모든 세월이 그 미소를 따라
은은하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