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의 여운 속의 빛
한국에 돌아온 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중에 구직활동 중 면접을 할 때면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이력서에 공백이 있네요. 뭐 하셨어요?"
"인도에 다녀왔습니다."
"여행이요?"
"순례 같은 거였어요."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설명할 수 없었다. 브린다반에서 무엇을 얻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일주일 동안 아팠다는 것밖에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변했다. 나는 채식을 시작했다.
가끔 밤에 잠들기 전, 그 소리가 들렸다. 하모늄의 드론 음. 므리당가의 박자. 아인드라 프라부의 목소리.
"하레 크리슈나..."
환청인가 싶었지만, 환청이 아니었다. 기억이 소리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나는 유튜브에서 그의 키르탄을 찾아 들었다. 영상은 수십 개가 있었다. 2008년, 2009년, 그 이전의 것들도.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그날 밤의 영상은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찾으려 하지 않았다. 아직 그 기억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2010년 7월 어느 날, ISKCON 관련 블로그를 보다가 알게 됐다.
"아인드라 프라부 입적"
입적. 그런 단어를 쓰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응시했다. 믿을 수 없었다.
“7월 16일. 브린다반에서. 방 안에서 일어난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브린다반을 떠난 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내가 그의 키르탄을 들은 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손이 떨렸다. 마우스를 쥔 손이.
나는 그가 살아 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키르탄을 부르던 해에. 그가 죽음을 향해 가던 그 시간 속에.
유튜브에 추모 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브린다반 ISKCON에서 열린 촛불 제사. 수천 명이 모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인드라 프라부 키 자이!"
어떤 영상에서는 그를 성인처럼 말했다. '순수한 헌신자', '마하만트라의 화신', '현대의 하리다스 타쿠르'.
나는 그런 표현들이 불편했다. 신격화. 우상화. 그가 원했던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도 했다.
그는 평범하지 않았다. 매일 밤 몇 시간씩 키르탄을 불렀다. 수십 년 동안. 멈추지 않고. 그런 삶은 보통 사람이 살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
나는 내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2009년 2월, 그 일주일.
아프고, 좌절하고, 도망치듯 떠났던 시간. 그때 나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달랐다. 나는 그의 마지막 해를 함께했다. 그가 살아서 키르탄을 부르던 마지막 1년 반 중 하나를.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브린다반을 떠난 뒤, 그는 1년 4개월을 더 살았다. 매일 밤 키르탄을 불렀다. 그리고 그 하모늄 앞에서 죽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내가 2주를 버텼다면? 만약 아프지 않았다면? 더 많은 키르탄을 들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내가 들을 수 있는 만큼 들었다. 내 몸이 허락한 만큼.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