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타: 길게 늘여 머무르라
모든 것이 있은 뒤, 시간이 꽤 지났다.
그동안의 추적 관찰에는 큰 이상이 없었고, 체력도 붙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럴까, 정작 내가 해야 하는 관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더운 여름날, 에어컨도 잘 못 키는 상황에서 붕대는 답답하다고 자주 풀었다. 안 감고 자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다. 운동은 핑계 삼아 미루기 일쑤였다. 병원에서 알려준 방법들과, 주변에서 하는 말들이,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족들도 슬슬 일을 하라는 압박을 해왔다.
"이제 치료도 끝났잖아."
"너도 슬슬 뭔가 해야지."
"원래 유방암은 치료받으면서 일하는 사람도 많다더라."
보험비도, 모아놓은 돈도 다 떨어졌기에 가족들의 말이 맞았다. 하던 일은 경력단절이 길어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사례와 나를 비교하면 내가 더 나약해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관련된 문제로 여동생과 크게 싸운 후,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올라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시작했다.
원래 하던 업무는 포트폴리오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니, 사무보조 위주로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다행히 업무 환경은 좋은 편이었다. 복지 중에 제일 만족스러운 건 점심 제공이었다. 사람들 또한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일을 알아봐야 했던 아르바이트생 한 명과는 개인 연락처를 주고받았는데, 다른 곳으로 처음 출근한 날부터 원래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지나가면서 그리워졌더랬다.
나 또한 천천히 업무에 적응해 가면서, 본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조금씩 할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몸은 내 계획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관리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울분을 쌓아 올리듯, 하루하루 피로가 겹쳐지면서 오른팔은 다시 부어올랐다.
단순히 살이 찐 거라 생각했던 몸의 변화가, 아무리 푹 쉬어도 나아지지 않던 피로가, 사실은 전부 림프부종 때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앉아서 하는 일이니 괜찮을 줄 알았던 아르바이트조차, 하루 여덟 시간을 버티고 나면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걸, 너무 늦게야 알아버렸다.
몇 개월 일하지도 못했는데, 몸 전체가 나에게 비상벨을 울려댔다.
빠져나갈 돈은 많은데, 모아놓은 돈은 없었다.
몸은 일을 거부하는데, 삶은 여전히 돈을 요구했다. 나는 두 벽 사이에 끼인 사람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말하니, 몇 년 전과는 다르게 "치료가 먼저니까 일단 쉬라"는 말이 나왔다.
그만큼 엄마가 보기에도 내 몸 상태가 정상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그 말 앞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멈추게 하고 있었으니까.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을 회사에 말하고, 곧바로 병원에 예약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이때쯤 오니 더 이상 낙관할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병이 삶을 멈추게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 안에서 버텨야 했다.
나는 병과 타협하며 살아야 했다. 때로는 그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더라도 다시 일어나야 했다. 치료가 끝났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고, 관리가 이어진다고 해서 삶이 멈추는 것도 아니었다. 고통과 무력감, 그리고 잠깐의 평온이 반복되는 그 일상 속에서, 나는 매번 다음 날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환자이고,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앞으로의 삶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어도, 나는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이것으로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