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화. 가끔은 계획 없이 걷는 밤도 괜찮다

오늘, 이 한 걸음이면 됐다

by 은월

오늘은 괜히 마음이 복잡해서 집을 나섰다.

이유를 묻는다면 딱히 없는데,

가만히 앉아 있기엔 생각이 너무 많았고,

가만히 눕기엔 마음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냥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도 없고, 어디를 가야겠다, 뭘 해야겠다

그런 계획도 없이 휴대폰도 주머니에 넣은 채,

조금은 멍하게, 조금은 엉켜 있는 마음을 데리고

그냥 걸었다.


길거리엔 사람도 드물었다.

늦은 밤의 골목은 조용했고,

가로등 불빛만이 내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누가 나를 알아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 시간.

그게 왠지 모르게 편했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기분.

낮 동안 엉켜 있던 감정들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풀리는 듯한 느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하루도 별로였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조금씩 걷다 보니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네’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상하게도 계획 없이 걷는 밤에는

내 마음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낮엔 바빠서 못 들은 속마음들이

밤의 고요함 속에서 조용히 떠오른다.


“오늘 사실 너무 지쳤어.”

“괜찮은 척했지만, 조금 서운했어.”

“아무것도 못 했다고 자책하지 마.”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싶다.

그리고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 나 자신밖에 없을 때가 많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더라.


나는 늘 무언가를 하려고 애쓴다.

하루를 보람 있게 보내야 한다고,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늘 나를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애쓴 하루가 아니어도,

오늘 내가 이렇게 걸어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 아닐까?’


발끝에 힘이 빠지고,

한참을 걸어 나오고서야

조금씩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계획 없이 걷는 밤.

그건 어쩌면 내가 나를 돌보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말도 안 하고,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지만

조용히 나를 꺼내어 들여다보는 시간.


사람들에게는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아도,

꼭 어딘가를 향하지 않아도

혼자 걷는 밤길에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그 길 위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

‘나는 오늘도 나름대로 잘 버텼고,

지금 이 순간, 나 자신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충분히 의미 있다’는 사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처음보다 숨이 덜 막혔다.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고,

혼자 있는 이 시간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가끔은 계획 없이 걷는 밤도 괜찮다.

그저 나를 위해 걷는 시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정해진 루트를 따르지 않아도

나는 지금, 잘 가고 있는 거라고.


나는 오늘도 나를 안아준다.


“조금 부족해도, 오늘의 나는 충분히 잘 살아냈다.”

우리는 같은 밤을 지나고 있었구나 @은월

keyword
금요일 연재